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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홍칼럼] ‘자유’를 자유롭게 하라

해방 정국에서 한국 국민의 이념 선택은 정통 우익이나 좌익이 아닌 중간 노선을 절대 다수가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군정이 1946년 7월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가운데 어느 체제를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 70%가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자본주의’ 13%, ‘공산주의’ 10%, ‘모르겠다’ 7%의 순서였다. 표본집단 1만명 중 응답자가 8476명으로, 무시할 수 없는 여론조사였다.

응답자들이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중간에 해당하는 이념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이념 소속감에서도 중립 54%, 우익 30%, 좌익 16% 순의 응답 빈도를 보였다.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직후여서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강했을 텐데도 예상 외였다. 개인주의적 자유보다도 함께 누리는 자유를 선호한 것으로 분석된다.

해방 공간은 새로이 수립할 정부의 형태와 정치 이념을 선택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한 시기여서 사상의 자유가 필수였다. 남북에 각기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6·25전쟁으로 분단이 고착되기 전 해방 정국에서는 남로당의 폭력혁명 노선을 불법화한 것 외에는 사상의 자유가 상당한 수준으로 보장되고 있었다. 정치 체계의 이념이나 기본 목표는 국민 다수가 공유하는 궁극적 가치로부터 도출돼야 한다. 그 궁극적 가치란 사회 구성원의 현재와 과거라는 역사적 종합에서 나온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ESG 시대사조에 비춰본다면 미래 세대의 니즈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방 자유 진영과 동구 공산권 간 냉전 대립구도가 펼쳐질 전야와도 같은 상황에서 이념적 선택의 자유는 한계가 분명했다. 다만 서방 자유 진영의 일원으로서 자유 이념을 선택해야 하면서도 다기다양한 자유 개념 중 한국 사회의 궁극적 가치에 적합한 내용으로 다듬을 여지는 상당히 남아 있었다.

미군정이 1946년 하반기 중간좌파의 여운형과 중간우파의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추진했던 것도 한국 민중의 다수가 중간 이념을 선호하는 데에 착안한 정책이었다.

미군정이 초기 본국 국방부에 보낸 정보보고서는 여운형을 공산주의자인데 기독교인이어서 혼란스럽다고 썼다. 그러면서 국무부가 그를 자유주의자들의 대표로 인식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여운형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나 부하린의 ‘공산주의 ABC’를 직접 번역해 만주 한인사회에 보급한 장본인이다. 1922년 2월 모스크바 극동노력자대회 참가 중 레닌 및 트로츠키와 만나 장시간 조선 혁명에 관해 의견 교환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 여운형은 조선에서 공산혁명이 아니라 우선 부르주아 민족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레닌도 적극 동의했다.

그러나 해방 후 여운형은 미군정과 협조해 좌우 합작 정부를 구성하려 활동했다. 그의 본심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로서 독립운동가라고 평가하는 것이 학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사회 구성원이 운명적으로 특정 이념에 지배당할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 따라 필요한 사상들과 결합시켜서 이상적인 융합형 이념으로 창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려면 자유 이념을 기존의 관념으로 묶지 말고 자유롭게 개방해야 한다. 기존의 자유 이념들을 보면 자유민주주의, 사회적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그리고 사회경제적 자유를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까지 포함할 수 있다.

우리 헌법은 공식 정치 이념을 규정하지 않고 있다. 헌법 전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라고 표기한 것이 전부다. 여기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주의보다 넓게 다양한 이념을 포용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헌법 전문은 이어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라고 규정해 유럽의 17~18세기 초기 자유주의와 같은 자유방임주의에 선을 그었다.

헌법에 특정 이념을 규정하지 않은 것은 스웨덴이나 네덜란드나 노르웨이와 같이 삶의 질이 높은 나라도 마찬가지다. 헌법에 국민의 기본권 보장만 핵심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 특정 이념이나 국가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았다. 국가 구성원 모두에게 최대한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치 이념, 종교, 신념의 선택폭을 거의 완전히 열어 놓은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중경제론을 주창한 진보적 자유주의자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상황에서 보수 우익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선택했다. 기업 경영에 고용과 해고의 유연성을 부여했고 규제없는 시장경제 정책을 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4년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 전쟁에 파병을 결정하면서 “내가 대통령만 아니었다면 파병 반대운동에 앞장섰을 것”이라고 여러 차례 토로했다. 개인의 신념과 이념 고착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 공직자의 규범이다.

지금 국민여론 조사로 바람직한 정치이념과 국정 철학을 질문한다면 어떤 답변이 많을지 궁금하다. 특히 MZ세대는 자유와 평등을 낡은 이념으로 보고 새로운 가치 찾기에 눈 돌릴 공산이 크다.

오래된 이념일수록 고정된 틀에 가두려 하면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따라가지 못하고 낙오할 수밖에 없다. 자유 이념을 자유롭게 해야 할 이유다.

김재홍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전 서울디지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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