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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광장] 1945년 8월, 여의도비행장
광복군 제2지대 간부들과 미국 OSS대원들
중국 산둥성에서 C-47수송기 앞에 선 광복군 정진대와 OSS 대원들.[독립기념관 제공]

1945년 8월 18일, 입추가 열흘이나 지났지만 한여름의 뙤약볕은 식을 줄 모르는 열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사흘 전 항복 선언이 있었으나 여전히 일본군이 주둔하는 경성비행장에 미군의 비행기 한 대가 착륙했다. ‘스카이트레인(Skytrain)’으로도 불리는 C-47 쌍발 프로펠러 수송기는 폭염만큼이나 굉음을 내며 더운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비행기는 다음날인 8월 19일 경성비행장을 이륙해 중국으로 회항한다. 당시 경성비행장은 여의도비행장을 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비행기에 미군과 함께 한국인들이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임시정부 광복군 정진대(挺進隊) 소속의 이범석(1900~1972), 장준하(1918~1975), 김준엽(1920~2011), 노능서(1923~2014)를 중심으로 함용준, 정운수, 서상복과 같은 한국계 미국인도 있었다. 정진대는 군사적으로 교란작전, 첩보 수집, 화력 유도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를 일컫는다.

광복 직후 미군 수송기를 타고 한국인들이 여의도비행장에 내린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미국은 전략첩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을 통해 한인들을 교육·훈련시켜 한반도로 침투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이른바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가 그것이다. 특히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에 걸쳐 기획한 이 프로젝트는 한인들을 활용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던 일련의 작전 구상이었다. 냅코작전에 투입된 한인들은 미국에 거주하는 민간인과 미군 소속 인원들이었다. 또 포로수용소의 포로, 일군에서 탈출한 학병 출신도 있었다. 이 중에서 이초(1894~?)는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서 활약한 인물로, 1920년 캘리포니아 윌로스에서 개교한 임시정부 비행학교 출신의 비행사였다.

한편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은 미국 전략첩보국 중국 전구(戰區)에서 주도한 프로젝트로, 한국광복군과 합작해 정보요원들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5년 2월 임시정부 군무부는 한국광복군이 미국과 합작해 한반도로 진입한다는 작전을 수립하고 전략첩보국 중국 전구와 교섭하기 시작했다. 교섭은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의 제안으로 시작해 제3지대의 김학규(1900~1967)가 접촉했는데 미국은 광복군에게 훈련과 장비를 제공하고 광복군은 대일전에 필수적인 정보를 수집해 제공하는 것으로 협의가 이뤄졌다.

1945년 4월 김구 주석과 미국 제14항공군 사령관 센놀트(Claire L. Chennault) 간 정식 협정이 체결됐다. 중국 두취와 리황에 설치된 훈련소의 교육은 정보 수집을 위한 첩보교육이 주된 내용이었다. 1기생들의 교육은 8월 4일 완료돼 8월 7일 한반도 진입을 위한 공동작전 수행이 결정되었다. 광복군은 전략첩보국과 연계해 정진군 공작반을 편성하고 작전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1945년 8월 18일 오후, 여의도비행장에 랜딩기어를 내린 수송기는 중국 시안에서 미국 전략첩보국 요원들과 광복군 정진대 대원들이 함께 타고 출발한 비행기였다. 본국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전달받지 못한 일본군과 대치 상황은 계속됐고, 함께 온 전략첩보국 요원들은 미군 포로들의 안전과 전후 한반도 상황을 파악하고자 할 뿐이었다. 결국 독수리작전을 실행하지 못하고 조국 땅을 밟게 된 광복군 정진대원들은 회한을 품고 여의도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여의도비행장 일본군 막사에서는 일본군들이 광복군에게 술을 따라주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진대원 김준엽은 회고록 ‘장정(長征)’에서 ‘국내에도 미리 광복군이 진입해 있었더라면 여의도에서 맥없이 우리가 발길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고 그때의 감회를 말한다. 이튿날 8월 19일 새벽, 겨우 열다섯 시간을 체류하고 C-47 수송기는 다시 여의도비행장을 이륙해 중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조국은 독립했고 광복을 맞았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꼬리날개 너머로부터 동이 터오는 조국의 산하가 결코 눈부시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제 제78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있었다. 행사에 참석한 후 여의도공원에 들러 C-47 수송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왔다.

안태현 국립항공박물관장

yj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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