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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칼럼] 고라니와 함께하는 치유농사
고라니에게 줄기와 잎을 심하게 뜯겨 고사위기에 처한 호박 모종이 마침내 시련을 극복하고 다시 새 줄기와 잎을 내 쑥쑥 자라고 있다. [필자 제공]

고라니는 농사 훼방꾼이다. 해마다 봄에는 막 자라는 작물의 어린 순과 잎을 탐식한다. 결실의 가을에는 농부가 미처 거두기도 전에 먼저 열매를 먹어치운다. 주로 밤에 몰래 활동하니 만나기도, 혼내주기도 어렵다. 농사를 망쳐놓기에 농부라면 하나같이 진저리를 친다.

올해 고라니의 도발은 이른 봄부터 시작됐다. 이웃 농가와는 달리 필자 농장은 고라니 침입을 저지할 그물망 울타리도 없고 달랑 묶인 채 짖어대는 풍산개 한 마리가 전부다. 거의 무방비 상태나 다름 없으니 고라니가 마치 제집처럼 드나든다.

강원 산간지역에서 일찍 봄소식을 전하는 산나물 중 눈개승마가 있다. 3월 하순께 생명에너지를 잔뜩 머금은 새순이 올라오는데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도 힐링이 된다. 겨우내 잃어버린 입맛을 찾아주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아뿔싸!! 길고 오동통한 새순은 이미 고라니가 먹어치웠다.

이어 맞은 봄의 미각은 두릅. 4월 중순께 앙증맞은 두릅 순이 머리를 밀고 나온다. 맨 처음 나온 두릅 순은 그 맛과 향이 특히 일품이다. 두릅나무는 가시로 무장해 접근하기 어렵건만 키 작은 나무의 순은 고라니가 이미 한발 앞서 취했다.

필자는 해마다 수박농사를 제법 짓는다. 올해도 5월 중순에 모종을 심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중 일부는 고라니에 의해 뿌리째 뽑혀 고사했다. 애지중지 키우던 고추도 일부 모종의 ‘머리(줄기 끝 생장점)’가 댕강 잘려나갔다.

농사 훼방꾼의 잦은 도발에 속수무책 당하기만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붉은 눈(소형 점멸등)’을 서둘러 배치했다. 농장 외곽의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으면 밤에는 바람에 흔들거리며 붉은 빛을 쏘아대니 겁 많은 고라니를 내?는 데 한 몫한다. ‘붉은 눈’이 힘 못 쓰는 새벽과 해 질 녘에는 풍산개가 대신 경계한다.

그러나 고라니의 도발은 잠시 주춤할 뿐, 계속 반복됐다. 호박의 어린 순과 잎까지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더니 며칠 후엔 상추까지 입질했다. 급기야 농장에 자생하는 도라지의 ‘머리’도 죄다 잘라먹었다. 이쯤 되면 농사테러다.

전전긍긍하다가 궁리 끝에 ‘붉은 눈’과 ‘흰곰’을 조합한 새 파수꾼을 추가로 여기저기 배치했다. 큰 흰색 스티로폼 박스를 높게 세워 그 안에 붉은 빛을 내뿜는 소형 점멸등을 설치한 것. 고라니가 밤에 맞닥뜨리면 영락없이 붉은 눈을 번득이는 흰곰처럼 보일 게 아닌가. 마침내 고라니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것으로 자신했다. 그러나 착각은 자유. 마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고라니는 이후에도 오이와 고구마, 그리고 토마토의 순과 잎을 돌아가면서 훼손했다.

고라니에게 당한 현장을 마주하게 되면 그 순간 화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10년 넘게 고라니와 전쟁을 치르면서 쭉 지켜보니 마지노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멧돼지처럼 아예 쑥대밭을 만들어놓지는 않는다는 것. 고라니는 애초 예민하고 겁이 많아 엉덩이를 뒤로 뺀 채 엉거주춤 조금만 먹고 간다. 또 필자 집과 밭은 붙어 있어 대놓고 도둑질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거칠게 짖어대는 풍산개와 붉은 빛을 쏘아대는 흰곰이 지키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풀 반·작물 반’인 필자농장은 작물로 꽉 찬 이웃 밭에 비해 먹을 것은 적고 찾는 수고는 더해야 하니 상대적으로 덜 오고 덜 먹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라니는 작물의 연한 순과 잎을 즐겨 먹는다. 이때 적당한(?) 입질은 인위적인 순치기, 잎 따기와 마찬가지로 피해 작물의 생명력을 되레 자극해 성장을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고라니에게 순과 잎을 뜯긴 작물은 살기 위해 더욱 왕성하게 새 곁순과 잎을 낸다. 나중에 결실 또한 풍성하게 안겨준다.

5월 하순 고사위기에 처했던 한 호박의 놀라운 반전은 지금도 생생하다. 고라니에게 줄기와 잎을 거의 다 뜯겨 밑동에 보일락 말락 남아 있던 곁순 하나가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살 가망이 없어 보여 사실 포기했었다. 그런데 6월 중순 어느 날 가보니 다 죽어가던 호박이 다시 새 줄기를 뻗고 많은 잎을 내 쑥쑥 자라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건 매직이요, 미러클이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농부는 생명의 경이와 함께 심신의 치유까지 얻는다.

시련을 극복한 작물의 열매는 고난 없이 맺은 열매와는 그 맛과 향의 차원이 다르다. 그 연단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순전한 약성이 열매에 깃들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라니에게 당한 각종 작물이 보여주는 극적인 반전은 값없이 그 생명에너지를 내 것으로 만드는 치유농사의 묘미가 아닐 수 없다.

이쯤 되면 고라니도 농사 훼방꾼으로만 매도할 순 없을 것 같다. 자연의 큰 틀에서 보자면 그 또한 치유농사의 도우미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고라니와 작물, 그리고 농부가 함께하는 치유농사라니!! 그 조화와 공생은 얼마나 위대한 자연의 섭리인가. 시골(전원)생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진정한 가치다.

박인호 전원칼럼니스트

hwshi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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