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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지만 또 다른 추억공유...시공초월 ‘한국인의 누들리즘’

혼자라도 여럿이서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다. 기자가 19일 찾은 서울 마포구의 한 24시간 라면 무인가게에는 ‘갈 곳이 없어서’, ‘싸니까’ 혹은 추억을 만들고자 라면을 끓인 이들의 사연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면을 사랑하는 한국인들의 ‘누들리즘(noodlism)’을 꿰뚫는 키워드는 ‘취향’이다. 스프와 면이라는 뼈대는 같아도 집집마다, 지역마다 선호하는 라면도 고명도 제각각이다. 기자가 찾은 무인가게의 셀프 조리 코너에도 콩나물, 햄, 파, 떡 등 8가지 고명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라면은 500여 가지가 넘지만 라면의 종류가 같다고 해서 맛이 같을 거란 보장은 없다. ‘너가 먹은 그 라면과 내가 먹은 이 라면’은 그래서 같지만 또 다르다.

한국인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라면에 관한 ‘오래된 소문’이 있다. ‘남이 끓여 준 라면이 제일 맛있다’는 속설이 대표적이다. 라면을 눈 앞에 만들어 오도록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떼를 썼다거나 낯선 이를 자신의 세계로 초대한 일화(영화 ‘봄날이 간다’의 대사 “라면 먹고 갈래”)는 낯설지 않다. 드라마, 영화에서 등장한 라면 먹는 모습은 한국 문화의 한 부분이 돼 K-푸드를 전파하는 홍보대사 역할까지 한다.

한국인이 사랑해 온 이 면발의 소리는 허기를 넘어 공허한 공간을 채운다. 산문집 ‘라면의 끓이며(2015년)’에서 국물과 면의 조화를 강조한 소설가 김훈은 “수많은 남들이 나와 똑같이 이 미끈거리는 밀가루 가락을 빨아들이고 있으리라는 익명성의 안도감도 작용하고 있을 성싶다”고 적었다. 한국인들은 이렇게 라면을 통해 맛을 넘어 정서를, 추억을, 비법을 공유한다.

그 면발의 매력은 입 안을 넘어 우리의 귀를 채웠다.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1987년)에 ‘라면과 구공탄(일명 라면송)’ 30년이 지난 지금도 라면 마니아 사이에서 회자되는 전설적인 명곡이다. ‘농~심 신~라면’부터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까?( ‘안성탕면 김치’ CF 주제가)와 같은 광고 속 멜로디는 세대간 공감대를 형성하는 공통의 기억이기도 하다. 온라인 음원 사이트에는 라면 찬가가 10여 개가 넘는다. ▷라면인건가(악동뮤지션, 2013년) ▷라면 좀 먹고 가요(포포리나인, 2013년) ▷라면 너라면 괜찮아(브로콜리너마저, 2021년) 등 외로움과 결합된 라면에 대한 애정은 공감의 대상이다.

라면은 영화·가요 등 대중문화를 통해 ‘따라’, ‘같이’ 먹어 보는 세계인의 문화로 확대됐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짜파게티다. 당시 ‘일요일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1988년)’라는 카피는 당시 일요일 점심에 가족을 뭉치게 해주는 일종의 주문과도 같았다. 이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년)은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 열풍을 불러왔다.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며 1999년 전국 라면 마니아의 모임도 생겼다. 국내 라면 마니아의 모임이자 다음 카페인 ‘라면천국’은 현재 회원 수가 4만명이 넘는다. 당시 모임 회장이던 최용민 씨는 회원들의 레시피를 모아 색다른 87개 라면요리비법을 담은 도서 ‘라면천국(2013년)’을 출간했다. 라면천국 회원들은 면 맛집 공유와 후기를 공유하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도 ‘아라봉(아름다운 라면 봉사의 줄임말)’을 통해 라면을 통한 선행을 실천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라면 예능이 본격화 했다. 예능 ‘남자의 자격-라면의 달인 편(KBS, 2011년)’에서 개그맨 이경규의 꼬꼬면이 ‘하얀 라면 돌풍’을 일으킨 후 최근에는 라면을 주제로 한 ‘라면 끼리는 남자(tvN, 2019년~2020년)’, 추석특집 ‘볼빨간라면연구소(2020년)’가 본격화 했다. 최근에는 유튜브를 통해 웹예능 형식의 ‘라면잉건가’, ‘라면꼰대’ 등도 인기를 얻고 있다.

광고를 넘어 유명인들의 레시피는 모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요리를 아무리 못해도 ‘라면을 못 끓인다’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조리와 가격도 부담이 적은 탓에 ‘나도 한 번’이라는 말이 그 어떤 식탁 위 메뉴보다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 최근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정국이 SNS에 선보인 ‘불그리(불닭볶음면+너구리)’ 레시피가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짜파구리 등 소비자의 라면 레시피가 실제 제품화 한 경우가 있어 업체들도 관심이 많은 편이다. 불그리 레시피가 화제가 되자 농심은 특허청에 ‘불그리’, ‘불구리’로 곧바로 상표를 출원하기도 했다. 김희량 기자

hop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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