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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미 시인의 심플라이프] 흐린 날도 화창한 날도 실수는 계속된다

연이어 이틀간 독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나의 마지막 산문집이 될지도 모르는 ‘난 그 여자 불편해’ 출간 후 첫 공식행사. 지난 6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관하는 북토크는 사회자가 있어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 약간의 비를 예고하며 작은 우산을 준비하라는 일기예보만 믿고 집을 나선 게 문제였다. 아침에 수영을 한 뒤 기분이 좋았고, 그 기분을 유지하려고 맛있는 점심과 저녁을 먹은 뒤 집을 나섰다. 운동화를 신으려다 간만에 독자들 앞에 나타나는데 격식을 차리고 싶어 자주색과 검정이 혼합된 오묘한 빛의 구두를 신고 아파트를 나갔는데 ‘아차!’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여행용 접이우산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큰비임을 직감했으나 행사 50분 전 우산을 바꾸려 집에 다시 갔다간 늦을 수도 있다.

대로변에 있는데 택시들이 그냥 지나갔다. 태워달라고 손을 흔들다 시간만 흘러가고, 안 되겠다 싶어 버스를 타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 빗발이 더 거세졌다. 밑창이 닳은 낡은 구두라 비가 샐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반듯한 땅을 골라 디디며 마음은 이미 재난상태. 퇴근시간이라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커다란 우산을 든 이들이 부러웠다. 내 집의 현관장에 멋지고 튼튼한 우산들이 가득한데 왜 오늘처럼 내가 빛나야 하는 날에 날개 살이 부러진 코딱지만 한 우산을 받쳐든 ‘불쌍한 사람’이 돼야 하나.

버스정류장에 도착할 즈음엔 신발이 푹 젖었고 양말도 축축했다. 캄캄해 길찾기가 더 어려웠다. 상담소에 문자를 보내고 행인들에게 물어물어 무슨 중학교 근처에 왔는데 소장님이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 있었다. 반가우면서도 죄송했다. 다행히 북토크 시간에 간당간당 맞춰와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실수를 하면 안 된다, 무난한 말만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오는 대로 뱉었다.

“내가 칼을 다 뽑지도 않았는데 그는 쓰러졌다. 그 스스로 무너진 거다”고 발언한 뒤에 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나의 심오한 은유를 알아듣는 분만 알아들으시라는 배짱,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가. 산문집에 친구들 언급이 많다며 내게 친구관계의 팁을 묻는 그녀에게 나는 말했다.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

대담이 끝난 뒤 질의응답시간에 어떤 분이 물었다. “아까 271번 버스 타셨죠? 왜 합정역에서 안 내렸어요?”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치고 한 번 길을 잃으면 계속 헤매는 습성, 나의 치명적인 약점을 분석해봤다. 첫째, 나는 날씨에 약하다. 옷과 구두를 날씨에 맞추지 못한다. 둘째, 상황에 따른 대처능력이 떨어진다. 셋째,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해가 쨍쨍했다. 대전역에서 아트포아트로 가는 길이 아름다웠다. 강변에 벚꽃 그림자를 밟으며 걷다 대동천변에 장기 두시는 어르신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오리가 노니는 개천, 퇴락한 대문에 낡은 간판들, 한가로운 풍경이 정겨웠다. 낭독회가 열린 아트포아트는 1945년 건물을 개조한 곳인데 세월이 묻어나는 우아한 공간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림 상점 주인 유혜원의 매력에 홀려서인지 평소 안 하던 실수, 돌아갈 기차를 놓쳤다!

시인·이미출판 대표

carri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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