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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길용의 Money Story] 국민연금 ‘대재앙’과 ‘연금지옥’까지 불과 18년

아포리아(aporia·α πορια)는 그리스어 부정접두사 ‘α’와 ‘다리’ 또는 ‘길’이라는 뜻의 ‘πορια’가 합쳐진 말이다. 풀면 ‘길이 없는 상태’다. 막다른 길은 필사의 판단을 요구한다. 깨달음이 필요하다. 시작은 ‘왜?’라는 질문이다. 진단이 정확해야 처방이 통한다.

서른다섯 살 국민연금 기금이 ‘아포리아’에 근접했다. 적립금 적자 전환시점이 불과 18년 앞이다. 역대 추정시점 가운데 현재로부터 가장 짧게 남은 시간이다. 적자 전환보다 고갈시기를 더 주목한다면 잘못이다. 연금의 문제로만 봐도 치명적 실수다.

국민연금 700조원 바겐세일 시작 불과 18년 후...자산시장 붕괴되면 경제 ‘대재앙’

35년간 900조원 넘게 쌓인 국민연금 적립금은 채권과 주식 등 자산시장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한다. 급여 지급을 위해 보유한 자산을 무더기로 팔기 시작하면 재앙적 충격이 불가피하다. 2041년부터 10년간 국민연금이 팔아야 할 주식·채권·부동산 등은 무려 700조원어치다.

국민연금의 지속적인 대규모 매도로 자산 가격이 하락하면 국민의 소득은 줄고 시중금리는 상승한다. 경기는 빠르게 급랭할 수밖에 없다. 최근 금리 급등 국면에서 드러났듯이 자산 가격 급락은 금융회사에도 치명적이다. 국민연금이 한 축을 담당하던 장기 채권의 국내 수급 기반이 무너지면 해외에서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외채 비중이 커지면 환율 불안에 취약해지고 그만큼 부도위험이 커진다. 자산시장 붕괴는 적립금의 잔존 자산가치도 떨어뜨려 고갈시기를 더 앞당길 수 있다.

국민연금 적립금 적자 전환과 고갈 문제는 오래된 난제다. 출범 10년도 안 된 1997년 이미 2025년부터 적립금이 적자(수입〈지출) 전환되고 2033년에는 고갈될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1998년 보험료율을 6%에서 9%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70%에서 60%로 낮췄다. 수령시기도 60세에서 65세로 늦췄다. 2003년 1차 재정계산에서 2036년 적자 전환, 2047년 고갈이 예상되자 정부는 2007년 소득대체율을 40%로 낮춘다. 2008년부터는 소득대체율 하락을 보완할 기초노령연금제도도 시행한다. 2008년 3차 재정계산에서는 적자 전환과 고갈시점은 2044년, 2060년으로 늦출 수 있었다. 저출산·고령화에 투자수익률까지 악화되며 2018년 4차 재정계산에서는 2042년과 2057년으로 시기가 다시 당겨졌다.

최근 이뤄진 제5차 재정추계 결과는 적자 2041년, 고갈 2055년이다. 현재부터 남은 시간이 불과 18년, 31년이다. 역대 재정추계 결과 가운데 가장 짧다. 16년 만에 다시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수령시기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투자수익률 둔화 불가피...소득대체율 하향도 한계

최근 국회 예산정책처는 국민연금 적립금 고갈을 늦출 몇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시기를 가장 많이 늦추는 시나리오가 2051년 정점, 2069년 고갈이다. 보험료율을 15%로 올리고(2025년부터 매년 0.6%포인트씩 인상) 소득대체율과 수급시기는 현재의 40%와 65세를 유지하는 방안을 채택하는 경우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도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정부와 국회 예산처 재정추계는 모두 연평균 4.5%의 투자수익률이 전제다. 수익률이 0.5%포인트 낮아지면 고갈시기가 1년 빨라진다. 1%포인트 높아지면 5년이 늦춰진다. 국민연금의 최근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4.99%다.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 9.58%,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 7.12%, 노르웨이 투자관리청(NBIM) 6.8%, 네덜란드 공적연금(ABP) 5.64%, 일본 공적연금(GPIF) 5.3%보다 낮다.

국민연금 보유자산 가격은 글로벌 경기에 영향을 받는다. 투자수익률은 경제성장률과 밀접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향후 5년간 세계 국내총생산(GDP)이 연평균 3% 성장할 것으로 봤다. 지난 20년간 5년 단위 연평균 성장률은 3.8%였다. 얼마 전 세계은행(WB)도 2020~2030년 연평균 2.2% 성장을 전망했다. 10년 단위 연평균 성장률은 2001~2011년 3.5%, 2011~2021년 2.6%다. 모두 세계화(globalization) 시대였던 지난 30년보다 현저히 저조한 성장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4.5% 수익률은 쉽지 않은 목표다.

투자수익률을 높여서 기금 고갈을 늦추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역시 방법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수령시기를 각각 올리고 낮추고 늘리는 길뿐일까. 현재 소득대체율 40%도 40년간 납입을 했을 때다. 대부분 가입자의 납입기간은 이보다 짧다. 실제로는 소득의 20~30%밖에 안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모수(parameter) 개편만 거듭하면 국민은 70세가 넘어 ‘쥐꼬리’ 연금받겠다고 평생 소득의 10% 이상을 징수당하는 처지가 된다.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든다. 도대체 정부가 생각하는 국민연금개혁의 근본적인 목적은 기금 고갈 방지일까, 국민의 노후 안정일까.

다음 세대 ‘연금지옥’ 막으려면...적립금 보존·정부 재정지원 필요

연금 고갈을 운운하는 것은 ‘공포’가 아니라 ‘공갈’에 가깝다. 적립된 기금으로만 연금을 지급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2022년 말 국민연금 적립금은 916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43%가 넘는다. 보험료 수입이 없이 20년간 이상 연금 지급이 가능한 세계 최대 수준이다. 일본과 스웨덴은 약 5년치 연금액인 GDP 대비 33%, 31.8% 수준이다. 미국은 3년 치로, 13.4%에 불과하다. 올해 국민연금은 45조원 이상의 운용수익을 예상하고 있다. 2041년부터 해마다 수십조원의 수익을 내는 적립금을 헐어 연금을 주는 게 과연 옳을까?

선진국 대부분이 그해에 걷은 보험료에 정부 보조금을 합해 연금급여 재원을 마련하는 ‘부과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래서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독일(18.6%), 스웨덴(17.2%), 일본(18.4%) 등이 모두 우리보다 높다. 덕분에 강제로 내는 사회보험료(노령연금·건강보험·장기요양보험·고용보험) 전체로 비교해도 한국은 18.8%로, 독일 39.8%, 스웨덴 26.7%, 일본 29.4%보다 한참 낮다.

선진국 노령연금의 고민은 기금 고갈이 아니라 재원 마련이다. 연금 갈등의 핵심은 정부와 국민이 얼마나 부담을 나눌지다. 독일은 보험료에 정부 보조금(약 24%)을 합해 그해의 급여 재원을 마련한다. 국민연금의 모델이 된 일본 후생연금도 2019년 기준 보험료 상한을 18.3%로 정하고 부족한 재원(20.9%)은 정부가 지원한다. 그럼에도 적립금 운용수익 기여(6.6%)가 적어 소득대체율이 낮다. 명목상 50%지만 40년간 ‘외벌이’로 살아오며 보험료를 낸 부부 기준이다. 실제로는 훨씬 낮다.

국민연금법은 ‘연금급여가 안정적·지속적으로 지급되도록 필요한 시책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고 국가의 책무를 정했다. 정부가 국민연금에 돈을 보탤 근거는 명시돼 있지 않다. 정부는 법에 이를 반영하기 주저한다. ‘적립금이 고갈되더라도 연금 지급이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기금 고갈 후 어떻게 재원을 마련할지에 대한 계획도 없다. 대신 부과 방식 비용률 추산은 꼬박꼬박 하고 있다. 기금 고갈 후 연금을 지급하려면 국민이 보험료를 얼마나 더 내야 할지에 대한 추산이다. 기본 가정 기준으로 2060년 29.8%, 2070년이면 33.4%다. 국민연금 보험료로만 소득의 30% 이상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정말 이 정도를 낸다면 대한민국은 ‘연금지옥’일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이 보유자산을 팔아 자산시장과 금융 시스템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면 국민의 살림도 어려워질 게 뻔하다. 형편이 어려워지면 소득의 30%가 넘게 될 보험료 부담도 더 커진다. 짐이 무거우면 나눠 지는 게 합리적이다. 민간이 낸 보험료와 적립금 운용수익 그리고 정부의 재정 지원이 ‘솥의 세 발’을 이루는 구조다. 2040년부터 운용수익을 제외한 급여 재원의 30%만 정부가 부담해도 2060년대 이후 국민 부담은 18~22% 수준이 된다. 2040년 이전부터 정부 지원이 이뤄진다면 적립금 정점까지 더 늦출 수 있고 그만큼 국민 부담도 줄어든다.

거듭 강조하지만 국민연금제도가 성숙한 선진국 대부분이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2040년 적립금은 1755조원으로 정점에 도달할 전망이다. 4% 수익만 내도 연 70조원이다. 한 해 보험료 수입과 맞먹는다. 이 정도 돈을 벌어들이는 재원을 유지하지 않고 헐어 쓰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재정 투입은 적립금 적자 전환 전에 이뤄져야 한다. 빠르면 더욱 좋다.

재정건전성 중요하지만...과연 누구를 위한 나라 살림인가

코로나19 관련 지출로 지난 3년간 재정 부담이 커졌다. 지속적인 지출이 아니다. 재정지출은 선택의 문제다. 고령화로 시간이 갈수록 노인 문제가 중요해질 게 뻔하다.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지는 게 당연하다. 재원 마련이 과제다. 섣불리 증세를 얘기하기보다는 우선은 불요불급한 지출과 세제 혜택을 줄이는 방법으로 최대한 재원을 만들어야 한다. 세금 환급 방식도 고민해볼 만하다.

2022 회계연도 국가부채 2326조원 가운데 정부가 재정을 보전하는 공무원·군인·사학·교직원연금 등의 충당부채가 1181조원으로, 절반이 넘는다. 국민연금을 다루는 이들 대부분이 공무원연금 수급자인 현실은 아이러니다. 건전재정을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재정의 가장 큰 수혜자다. 내년이 총선이다. 공무원에만 맡기지 말고 정치권이 국민연금개혁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직역연금도 이번에 함께 개혁해야 한다. 우리가 연금제도를 베껴 온 일본도 이미 직역연금을 후생연금과 통합했다.

소득비례연금이 해법(?)...국민연금 취지 퇴색, ‘사이비’복지될수도

일각에서는 소득비례연금 도입을 주장한다. 현재 국민연금은 낸 돈의 2배 이상을 받는 구조다. 소득재분배 기능도 갖춰 중산층 이하 서민의 수익비가 더 높다. 이를 낸 만큼만 받는 것으로 바꾸자는 주장은 얼핏 괜찮아 보이지만 치명적 약점이 있다. 중산층 이하는 기대연금수령액이 현저히 하락한다. 소득대체율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중산층 이상에도 크게 득이 될 게 없다. 국민연금 강제 가입의 명분이 ‘낸 것보다 더 받는’ 구조다. 그 매력이 사라진다면 그냥 민간 연금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선진국 가운데 소득비례연금을 도입한 대표적 사례가 스웨덴이다. 그해 걷은 보험료로 당해 연금 재원을 충당한다. 근로자는 7%의 보험료를 부담하는데 전액 환급된다. 결국 재원을 고용주(자영업자)가 50.3%, 정부가 49.2%로 나눠 부담하는 구조다. 근로자로서는 낸 만큼만 받는 게 아니라 사실상 안 내고도 받는 셈이다. 스웨덴이 소득비례연금 도입에 성공한 이유다. 우리나라는 소득이 낮은 자영업자 비율도 유독 높다. 국민연금에서 소득재분배 기능이 사라지면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자영업자의 소득대체율은 더 떨어진다.

소득비례연금을 도입하면 중산층 이하의 소득대체율 하락을 막을 기초연금 강화가 필수적이다. 기초연금은 100% 국가에서 지급한다. 국민연금에 돈을 보태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정에 부담이다. 현재 기준으로 2040년부터 기초연금에만 최소 40조원 이상의 재정이 필요하다. 기초연금을 늘리면 재정 부담은 이보다 더 커질 게 뻔하다. 소득비례연금을 도입해도 기금 고갈을 막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 자료를 보면 국민연금을 소득비례 방식으로 바꾸고 보험료율을 12%로 올려도 적립금은 2044년에 적자로 전환되고 2061년에는 고갈된다.

초고령화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노인을 위한 나라’에 대비가 시급하다. 정부의 이번 국민연금제도 손질은 모수 개편을 넘어 구조까지 개혁하는 수준이 돼야 한다. 대재앙의 시작이 될 적립금 감소시점이 18년도 남지 않았다. 근본적인 개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적립금이 고갈된다는 공포로 국민에만 부담을 강요하거나 세대 간 다른 이해를 정치적으로 악용해서는 안 된다. 정치권과 정부 모두 국민 부담을 줄이고 갈등을 조정하는 데에만 주력해야 한다.

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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