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한국형 제시카법 탄생시킨 정명근 화성시장의 뚝심

정명근 화성시장.

[헤럴드경제(화성)=박정규 기자]2022년 10월 말 과거 수원 일대에서 범행을 저질렀던 성범죄자 박병화가 15년 수감 생활을 마치고 출소했다. 박병화는 가족이 미리 마련해 둔 화성시의 한 원룸으로 입주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화성시와 인근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정명근 화성시장은 거센 항의를 했다. 화성시는 아무런 통보도 없이 박병화를 출소시켰다며 법무부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고 출소한 성범죄자 거주지에 대한 기준을 마련해줄 것을 요구했다. 박병화 거주지 주변 인근에 대학교가 있고, 일대가 원룸촌이어서 대학생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대부분 여성들이다.

정명근 화성시장은 재빨리 대책을 마련했다. 경찰 협조를 받아 주택가 골목을 경찰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 성범죄 전과자 박병화가 출소 후 거주하게 된 원룸 주변의 경계를 강화한 것이다.

문제는 반경 500m 안에 어린이집 2곳과 초등학교 1곳이 더 있다는 사실이다. 주민들은 성범죄 전과자가 이웃이 된다는 소식에 크게 반발했다. 박병화의 거처는 출소 전 가족이 대신해 계약을 맺었다. 계약 당시 집주인은 실제 누가 살게 될지는 몰랐던 것이다

박병화는 20대 여성 10명을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돼 15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했다. 10년간 전자장치 착용, 성 충동 조절 치료, 새벽 외출 제한 등을 준수해야 하고 전담 보호관찰관의 밀착 감시를 받게 된다.

정명근 화성시장은 매일 박병화 주거지 인근에서 주민들과 항의집회를 가졌다. 주민들의 분노는 폭동 수준에 달했다. 안산시 역시 아동 성폭행범 조두순의 거주로 큰 피해를 보고 있다. 강력 성범죄자 출소 때마다 거주지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향후 3년 간 성범죄자 5000 명이 출소할 것으로 집계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명근 화성시장은 정부에 제시카법 제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앞서 지난 2005년 2월 24일 미국 플로리다 주(州)에서 성범죄 경력이 있는 존 쿠이라는 당시 46세의 남성이 옆집에 침입해 잠을 자고 있던 9세 소녀 제시카 런스포드를 자신의 집으로 납치해 잔인하게 성폭행한 뒤 살해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같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 범인 존 쿠이는 이미 아동 성범죄 전과 2범으로,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모범수로 2년 만에 출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후 제시카의 아버지는 “내 이웃이 성범죄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미리 피해서 딸이 살해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성범죄자에 대해 엄격한 관리를 해 달라는 강력한 요청을 했고, 플로리다주 의회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제시카 런스포드 법(Jessica Lunsford Act)’이 생겨나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플로리다주는 이를 계기로 아동 성범죄자는 초범이라도 25년 징역 이상, 재범은 무기징역 선고를 원칙으로 하고, 출소한다고 해도 평생 전자 위치 추적 장치를 착용해야 하는 ‘제시카 법’을 제정했다.

제시카 법은 미국 30개 이상 주(州)에서 시행 중아디. 성범죄 전과자가 학교와 공원의 2000피트(약 610m) 안에서 살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

미국 플로리다 중부의 도시 세인트피터즈버그에는 ‘변태 마을(pervert park)’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팔리스 이동식 주택 단지’라고 쓰인 표지판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2000㎡ 넓이의 트레일러 파크에 출소한 성범죄자들이 모여 산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거리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은 모두 주택이 아니라 컨테이너 박스이거나, 캠핑카처럼 트레일러를 이용한 이동식 주거지로 되어 있다. 120~130명의 이곳 ‘주민’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몰려들었다. 미국에서 성범죄자에게 가장 가혹한 규제를 가하는 곳 중 하나인 플로리다의 엄격한 주거제한 규제를 따르려면 여기밖에는 살기에 적합한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강력한 규제 때문에 수백 명의 출소 성범죄자들은 살 곳을 구하지 못하고 노숙을 하는 일도 흔한데, 이들을 위해 기독교단체가 만든 ‘미라클 빌리지’라는 주거단지도 있다.

정 시장은 지난해 12월 27일 국회와 법무부를 방문, ‘연쇄 성범죄자의 주거대책 마련 및 치료감호를 위한 법 개정 촉구 건의문’과 성폭행범의 화성시 거주를 반대하는 시민 서명부를 제출했다.

이어 박병화의 화성시 전입 직후부터 긴급대책회의와 성명서 발표, 기자회견 등 법무부와 여성가족부, 국민권익위원회 등을 상대로 성범죄자의 거주제한 등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정명근 시장은 성범죄자의 거주지 제한, 전자장치 부착기간 강화, 전담 보호관찰관 지정 등 규제 마련과 지자체장의 각종 권한 신설, 고위험 성범죄자 등에 대한 보호수용제도 도입을 법무부에 건의했다.

마침내 정부는 신년사를 통해 ‘제시카 법’ 도입 적극 검토라는 입장을 밝혔다. 정 시장의 뚝심과 집념의 승리였다.

정부는 ‘2023년 법무부 5대 핵심 추진과제’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고위험 성범죄자가 학교와 유치원 등 교육시설 500m 이내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한국형 제시카법’ 도입 추진 의지를 밝혔다.

정부는 “고위험 성범죄자에 대한 다양한 대책이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대책만으론 부족했다”며 “불특정 다수를 사냥하듯이 범죄를 저지른 ‘괴물’들에게 주거제한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무부는 거주제한 내용 등이 담긴 전자장치부착법 개정안을 오는 5월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거주지 제한 반경은 최대 500m에서 사안별로 법원 결정을 받기로 했고, 법원이 수용시설이나 보호시설 거주를 지정할 경우 해당 시설은 거리 제한에 예외를 둘 계획이다.

정부가 올해 핵심 추진과제로 선정한 ‘한국형 제시카법’이 도입되면 한국도 위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법이 시행되면 출소한 성범죄자들은 거주지 선택에 상당한 제약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 서울시처럼 교육 시설이 촘촘히 있는 곳은 아예 거주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범죄자들이 지방으로 몰릴 수도 있고, 미국의 ‘변태 마을’처럼 성범죄자 거주지가 새로 집단적으로 형성되며 ‘게토화(ghetto·지역의 낙후 및 격리)’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수도권과 달리 인구 감소 지역으로 꼽힌 전북, 경북 등 지방의 경우 산지를 제외하고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500m 제한에 걸리지 않는다.

성범죄자 이웃으로 둔 주민들은 적극 찬성이다.

각각 2020년, 2022년 출소한 성범죄자 조두순과 박병화도 법이 시행되면 주거지를 옮겨야 한다. 조두순이 사는 경기 안산시 와동 자택은 150m도 안 되는 거리에 유치원이 있다. 자택 입구 바로 앞에서 골목을 한 개만 넘어가면 도로 전체가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되어 있다. 박병화가 사는 경기 화성시 봉담읍 자택도 500여m만 가면 초등학교가 나온다.

이 때문에 인근 주민 및 학생들은 법안 추진 소식에 반색을 표했다. 지난 2월 7일 화성시 봉담읍에서 만난 22세의 수원대학교 재학 여성은 “집이 서울 강북 쪽이라 통학이 2시간30분쯤 걸리지만 매일 오가며 통학한다. 여기서 자취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특히 (박병화가 사는) 그 위쪽 원룸촌에 사는 여자 친구들은 거의 한 명도 못 봤다. 성범죄자 한 명 때문에 학교 주변 일대가 뒤숭숭한데, 차라리 강력한 법이 통과돼서 어느 한 곳에 몰아넣어 버리는 게 여러 사람 위해 더 낫지 않나 싶다.”

조두순이 이사가려 했던 경기 안산시 선부동에서 공인중개사무소를 운영하는 최모씨도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특정 지역이 낙후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지금도 한 명 때문에 동네 전체가 다 죽는데 그럼 이건 특정 지역이 낙후되고 있는 게 아니냐”라고 반박했다. 최씨는 “(조두순이 지금 사는) 와동에 가보셨냐. 그 사람 한 명 산다고 동네 분위기가 말이 아니다”라며 “어차피 그 사람들이 나와 살아야 한다면 애들 키우는 북적북적한 데 말고 다른 곳에 가서 살아야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말했다.

‘다 사람 사는 곳’이라지만, 실제로 신상이 공개된 강력 성범죄자 거주지에 가보면 그들의 존재감은 확연히 드러난다. 동네 곳곳에 내걸린 퇴출 요구 현수막을 제외하고라도, 화성 봉담읍과 안산시 와동 모두 지자체 소속 청원경찰과 지구대 경찰이 각각 주기적으로 순찰을 돈다. 성범죄자 자택 앞 골목 앞뒤로는 치안센터가 각각 한 개씩 있어 24시간 경찰이 상주한다. 경찰들은 뻥 뚫린 유리창으로 주변을 감시하는데 인근 전신주에도 모두 CCTV가 서너 개씩 달려 있다. 이렇게 엄격하게 감시하는 인력을 따로 두면서 산발적으로 동네를 고립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규제에 걸리지 않는 특정 지역만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게 주민들의 입장이다.

정 시장의 제시카법 통과로 한국은 성범죄자 출소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재범 방지 등 실질적 정책 효과를 기대하려면 제시카법을 넘어 보호수용제도 도입까지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보호수용제는 재범 위험성이 높은 흉악범은 형기가 끝나도 교정시설로 보내 다시 일정기간 격리시키는 제도로,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실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의 국가에서는 보호수용제와 같은 범죄자 사후 격리 방식을 시행하고 있다. 재범을 일으킬 개연성이 의학적으로 충분히 소명된 사람에 한해서 정신병원, 사회치료시설 등에 일정 기한 수용하며 치료를 병행하는 식이다. 미국 워싱턴주에서는 페리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맥닐섬에 이러한 마을을 조성하고 주법원의 허가하에 출소 성범죄자에 대한 민간 감금 방식을 허용하고 있다. 이 치료시설은 출소자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됐다고 판단되면 보다 느슨한 주거제한이 있는 시설로 이들을 내보내는데, 그때마다 인근 주민들의 반대 시위가 이어진다는 현지 언론 보도도 나온다.

화성 주민들이 반발하고있다.

한국형 제시카법과 미국은 다소 차이가 있다.

법무부가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형 제시카법은 미국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은 초·중·고등학교와 어린이집·유치원으로부터 500m 이내 거주를 제한하는데요. 미국보다 100m 이상 기준이 완화된 셈입니다. 또한 미국과 달리 공원도 거주 제한 기준에서 빠졌다. 윤웅장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장은 “미국보다 인구 밀집도가 높은 점, 공원이 학교보다 많은 국내 사정 등을 고려했다”라고 했다.

물론 논란도 있다. 실효성을 두고 엇갈린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피해자 보호’라는 취지는 환영하지만, 거주이전의 자유를 침해할 여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예상 가능한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한 도입이라는 의견 반면에, 범죄 예방과 성범죄자 당사자의 주거이전 자유 사이에서 갈등 관계가 생길 수밖에 있는 만큼, 주거를 구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시행 효과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있으며 적용 대상이 모호하고 포괄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명근 시장은 “박병화 퇴출을 위한 화성시민들의 노력이 법무부를 움직이게 한 것으로 법과 제도 등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기대한다”며 “국회에 이어 법무부에서도 박병화 등 성범죄자의 퇴거 및 거주제한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만큼 속히 대책이 마련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fob140@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