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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이 진 적 한 번도 없어” 30년 ‘NO감산’ 괜한 자신감 아니다 [비즈360]
1993년 메모리 1위 달성 30년
1990년대 후반 이후 무감산 기조 유지

[헤럴드경제=김지헌 기자]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어 1993년 이후 줄곧 세계 1위 ‘왕좌’를 지킨 삼성전자가 1990년대 후반 이후 단 한 차례도 ‘인위적 감산(반도체 칩의 원판인 웨이퍼에 대한 투입량 감소)’을 공식화한 적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역사적으로 두 차례 진행된 메모리 반도체 치킨게임(어느 한 쪽이 이길 때까지 피해를 무릅쓰며 경쟁하는 게임)에서 삼성이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자신감에서 비롯된 결과다. 이를 통해 삼성은 줄곧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모리 반도체 칩 가격의 급락과 산업 지형 재편성의 주된 키를 언제나 삼성이 쥐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에 극심한 반도체 냉각기가 진행되는 현재 새로운 치킨 게임이 전개되는 가운데, 삼성이 또 한 번 ‘NO감산’ 정책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메모리 1위 후 ‘치킨 게임’…‘원가경쟁력’ 레이스의 서막

1974년 12월 삼성전자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산업에 입문했다. 9년 후인 1983년에 초고밀도집적회로(VLSI) 반도체 진출을 선언하며 처음으로 ‘메모리 칩’ 생산 사업을 본격화했다.

삼성전자가 이 메모리 칩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른 건 그로부터 10년 뒤인 1993년이다. 당시 시장조사업체 가트너가 추정한 시장 점유율은 10.8%. 1980년대까지 세계 시장을 주름잡았던 도시바, 파나소닉 등 일본 반도체 기업을 삼성이 제친 것이다.

이후 1993~1995년 글로벌 PC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D램 메모리 시장은 ‘폭풍 성장’했다. 제품 호황에 메모리 기업들은 쾌재를 불렀지만, 당시 시장 성장은 향후 ‘대공황’이라 불릴 정도의 역대급 치킨 게임의 서막이 된다.

당시 일본(5곳), 한국(3곳)을 비롯해 전세계 12곳의 반도체 기업이 D램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1995년부터 경쟁적으로 공장을 건설했다. 그 결과 1996년부터 이들 기업간에 D램 가격 하락 폭이 거세졌다. 당시 PC용 D램 가격이 약 90% 가까이 하락했고, 서버·그래픽 D램 등도 60~70% 가량 떨어졌다.

그러나 이같은 급박한 상황에 삼성은 몇 차례 공장 라인 가동을 중단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긴 했으나 다른 기업에 비해 감소폭을 키우진 않았다. 그만큼 원가경쟁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2년 9월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한 삼성은 슈링크(칩의 고집적화) 개발과 당시 주력제품 고용량화를 통해 웨이퍼당 비트 생산량을 매해 40~50%가량 끌어올렸다. 그만큼 반도체 칩의 원가는 유지하면서도 용량을 매우 큰 폭으로 증가시킨 것이다. 반도체 제조 원가를 다른 경쟁사보다 낮춰 반도체 시황이 급격히 악화돼도 타사에 비해 월등히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도록 했다.

삼성전자가 지난 1992년 9월 세계 최초로 개발한 64메가 D램.[삼성전자 제공]

이때 삼성은 오히려 설비 투자를 늘리며 전반적 공급량을 이전보다 확대시켰다.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삼성의 D램 사업부의 연간 평균 자본 투자액은 1억3400만달러(약 1700억원)로 일본 D램 기업 4곳의 연간 평균 투자액의 4.7배를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전자가 당시 최신인 8인치 공정 기술을 일본보다 선점한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다.

당시 치킨게임은 1998년까지 이어지며 반도체 업계의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1999년 일본 NEC와 히타치 D램사업부가 통합돼 ‘NEC 히타치 메모리’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1980년대에 전세계 D램 반도체 시장의 80% 가량을 장악한 일본의 위상이 한순간에 무너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 회사가 다시 2000년 5월에 이름을 ‘엘피다 메모리’로 바꾼다. 엘피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희망의 정령 ‘엘피스(Elpis)’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본 반도체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전해진다. 엘피다는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 이어 글로벌 3위의 점유율을 유지, 당시 일본 반도체의 명맥을 유지했다.

치킨게임의 또 다른 결과로 1999년에는 현대전자가 LG반도체 경영권을 확보하는 등 통합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1997·1998년 IBM으로부터 D램 최우수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던 현대전자는 통합 작업 후 2001년 하이닉스반도체(SK하이닉스 전신)로 사명을 변경한다.

궁지에 몰릴수록 삼성은 ‘생산능력 확대’

2006년에 D램에 대한 급격한 호황이 찾아오면서 또 다른 치킨 게임이 발발했다. 당시 메모리 칩 회사들은 이같은 호황을 예상 못했다고 한다. 2006년 중국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PC 시장이 되었고 중국의 대명절인 춘절이 D램 시장의 뜨거운 판매 시즌으로 부상했다. 중국 외에 다른 신흥 시장에서도 PC 판매 수준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1990년대 미국·유럽이 PC 수요를 끌어올리며 치킨게임의 전초전을 만든 양상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낸드 플래시 수요 증가가 D램 시장의 칩 부족을 부추기며, D램 치킨 게임을 유도한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삼성전자가 D램 생산라인을 낸드로 전환하며 D램 메모리 공급 부족을 일부 유도했다는 평가다. 삼성은 당시 애플과 플래시 메모리 칩을 공급하기로 장기 비밀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 나노’를 출시하기 위해 애플이 낸드 공급업체로 삼성을 택한 영향이다.

이 상황에서 대만 메모리 업체들을 중심으로 ‘단가 후려치기’식 칩 생산·판매가 거세졌다.

그러나 삼성은 당시에도 원가경쟁력을 바탕으로 ‘치킨게임’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2006년 4분기에 삼성 반도체는 영업이익률 31%를 기록하며, 10%대인 엘피다, 키몬다, 마이크론을 압도했다. 동일한 금액만큼 D램 판가가 하락해도 당시 다른 기업들에 비해 손실 가능성이 훨씬 적은 것이다.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삼성 본사 건물 내부에 한 직원이 지나가고 있다.[로이터]

위기감을 느낀 글로벌 기업들은 연합군이 돼 삼성에 맞섰다. 엘피다는 대만의 ‘파워칩’, 중국의 SMIC와 제휴를 맺었다. 그들의 시장 점유율은 2006년에 21%였다. 당시 세계 D램 2위인 독일 키몬다는 또 다른 대만 업체인 난야와 협력하여 합작 회사를 설립해 21%의 시장 점유율을 챙겼다. 하이닉스반도체는 대만의 기업인 프로모스와 손잡았다.

그런데 이런 기업들의 연합 공세로 시장 점유율이 소폭 감소하자 오히려 삼성은 생산능력 확대로 맞섰다. 이로 인해 마이크론이 2006년 12월부터 순손실을 보기 시작했다. 당시 삼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회사가 손실을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삼성을 제외한 다른 기업 역시 감산 없이 투자를 계획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한다. 업계 관계자는 “다른 D램 경쟁사들은 삼성의 사례를 보면서 감산이 치킨 게임에서 승리 비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전했다. 칩의 생산을 줄이는 게 아니라, 더 원가가 싼 칩을 대량 생산해 많이 시장에 파는 것이 버티는 길이라는 점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원가가 싼 칩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 기업들은 기존의 8인치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12인치 웨이퍼(칩을 만드는 바탕이 되는 원판)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고, 칩 기술 고도화 역시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기업들간 무감산 경쟁은 이들을 ‘진정한 치킨 게임’으로 안내했다.

그 결과 2007년 2분기 D램 칩 생산량은 전년 동기보다 31% 증가했다. 2008년에도 칩 생산량은 증가했고 D램 가격은 대폭 떨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가시화된 2008년 하반기가 돼서야 치킨게임이 끝났다. 전세계적으로 유동성 위기가 찾아오자 금융기관들이 파산했고 현금 악화를 우려한 파워칩, 엘피다, 하이닉스반도체가 9월에 칩 생산 축소를 발표했다. D램 칩은 2008년도에 가격이 고점보다 70% 넘게 하락하기도 했다.

엘피다 경영진이 파산신청과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는 모습. [AP]

또 다시 판이 뒤바뀌었다. 키몬다가 2009년 1월 처음으로 파산을 선언했다. 일본 정부가 2009년 300억엔(약 3000억원)의 공적 자금을 지원하고 채권단이 1000억엔(약 1조원)을 융자하기로 한 엘피다는 3년을 버티다 2012년 2월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2012년 7월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가 엘피다를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D램 시장은 현재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2012년에 SK그룹 편입), 마이크론의 주요 3강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주요 외신에선 “일본 엘피다가 한 중대한 실수는 현금이 풍부한 시장 리더인 삼성전자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막대한 반도체 자본 지출을 한 데 있다”고 평가했다.

당시 대만의 D램 산업이 붕괴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TSMC를 보유한 대만은 당시 메모리 산업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D램 산업은 2007년 초 이후 거의 7분기 연속 총 100억달러(약 13조원)의 손실을 입었는데, 대만 제조업체의 손실 비율이 전체 산업 손실의 42%를 차지했다. 2009년 1분기 삼성의 공장 가동률이 89%일 때, 대만의 파워칩·난야·프로모스의 가동률은 각각 23%, 40%, 15%에 불과했다. 주요 기업들의 파산 행렬이 이어졌다. 당시 대만이 자국의 전체 D램 공급망 붕괴를 뼈아프게 받아들이며, 반도체 산업 육성에 대한 의지를 다지게 됐다는 후문이다.

재고자산 확대에도 ‘無감산’ 외친 삼성…반도체 판도 변화 올까

2017년부터 반도체 시장은 슈퍼 사이클(장기 호황)에 접어든다. 2019년 일시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업황 하락세가 나타났지만 2020년 회복되면서 2021년 초까지 호황이 이어졌다.

삼성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속적으로 웨이퍼 투입을 줄이는 방식의 ‘인위적 감산’은 없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 역시 사내에 “업계 전반적인 움직임과 달리 삼성전자는 투자를 축소하지 않는다”며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해 메모리 사업 분야에서 초격차 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이 메모리 시장 1위를 수성하고 있지만 사내 위기감은 어느때보다 높아 메모리 후발 업체들을 따돌리기 위한 선택이란 분석이다. 사상 최고의 재고 물량이 쌓이는 상황에서도, 메모리 시장 점유율 40%에 안주해선 안 된다는 의지를 경영진이 강하게 피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 생산기지인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삼성전자 제공]

주요 D램 제품 가격이 2달러 밑으로 떨어지며 최근 업계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2018년 8달러를 상회하던 PC용 D램 범용제품(DDR4 8Gb 1Gx8)의 1월 평균 고정거래 가격이 지난 1월 말 1.81달러를 기록했다. D램 제품의 평균가격은 지난해 4분기에 기준 직전분기보다 20~25% 떨어졌는데, 다시 올해 1분기에는 직전분기보다 13~18% 가량 하락할 것으로 관측된다. 가격 하락 흐름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대규모 ‘치킨게임’ 가능성이 대두되며 반도체 판도 변화가 예상된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선 이번에 치킨 게임이 진행되더라도 과거 두 차례만큼 파괴력이 있진 않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일단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투자를 올해 줄이면서 적극적인 감산에 나서고 있다. 2000년대 후반 벌어진 생산량 증대 경쟁보다는 출혈이 적을 것이란 관측이다. 또 삼성이 인위적 감산을 하진 않지만 기술공정 변환과 팹(공장) 가동 수준 조절을 통한 자연적 감산으로 대응하는 점 역시 영향을 미칠 것이란 분석이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시장 둔화에 따른 수익성 악화로 올해 시설투자 50% 이상 축소와 감산 등을 예고했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지난 1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림대 도헌학술원 개원 심포지엄에서 “공급이 초과할 때는 ‘슬로우 다운’을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너무 감산하는 것도 경쟁력 차원에서는 좋은 게 아니다”며 “경쟁력도 감안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마이크론은 올해 설비투자 규모를 30% 줄이겠다고 선언한 데 이어 웨이퍼 팹 장비(WFE) 비용을 전년 대비 50% 이상 감축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장기적인 시장 지위 변동에 대한 우려는 제기된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중국 우시에 D램 공장을 운영 중이다. 감산과 더불어 미국·중국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겹치며 팹 가동에 대한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 직원 10% 감원 목표를 발표한 마이크론은 내년 5000명가량을 구조 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적자 전환에 따른 추가 감산 가능성도 거론된다. 삼성을 제외한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감산 경쟁에 따른 두 기업간 향후 시장 판도 변화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온다. 삼성이 향후 D램 경기 회복기에 지금보다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도 있다.

낸드의 경우 글로벌 시장 2위, 4위 기업인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WD)의 합병 논의가 수면으로 올라오고 재고 이슈가 지속되면서 D램 시장보다 큰 폭의 지각변동을 관측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최근의 치킨게임은 메모리 회사들의 지각변동을 이끈 과거 대규모 치킨게임과는 다른 양상으로 보인다”며 “경기 침체 따른 칩 가격 하락과 재고 증가가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어 “경기 침체기엔 당장 메모리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급박한 변화는 없겠지만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감산 기조로 볼 때, 장기적으로 경기 회복기가 되면 삼성에게 수익성 측면에서 유리하게 될 가능성은 있다”고 분석했다.

ra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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