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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년만에 알게 된 성인ADHD “잦은 실직·생활고 원인이었네”
특정 행동 과도한 집중 혹은 구멍
해고·자진퇴사 반복 “잔고 늘 0원”
“일부러 그래?” 주변 ‘무지’도 상처
약물치료 통해 주의력 개선 필요
상상력·활동성 잘 활용하면 장점
민바람(40)씨의 다이어리. 스스로 세운 계획을 잊어버리거나 변경하는 경우가 잦아 늘 빽빽하다. [민바람씨 제공]

“잔고는 0원인 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2년 전 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 장애(ADHD) 진단을 받은 민바람(40·필명)씨는 이렇게 말했다.

대학 졸업 직후부터 20년을 꼬박 노동자로 살아왔지만, 민씨의 잔고는 언제나 ‘0원’이다. 카드값이 연체되지 않는 날이 드물다.

현재 편의점에서 평일 아르바이트를 하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민씨는 “글을 쓸 시간은 늘 부족하지만, 한 끼에 만원이 넘는 고물가에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일 순 없다”고 했다. 언제나 불안정했던 일자리 역시 민씨의 경제상황에 한몫을 했다. 일자리를 얻어도 해고되거나, 금방 그만두는 일이 잦았다. 대학 시절엔 선배의 소개로 과외를 해보기도 했지만, 학생의 말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재작년 ADHD 진단을 받은 박기영(41·가명)씨도 마찬가지다. 박씨는 “사무직으로 일하던 시절 세금계산서를 관리해야 하는데, 예산 뒤에 0 하나를 더 써서 잘린 일도 있었다”며 “약을 먹어도 딱히 나아지지 않아 지금은 그냥 체념하고 살고 있다”고 했다.

민씨나 박씨의 실수는 누구나 겪을 만한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성인 ADHD 환자들에게 이는 ‘일상’이다. 특정 행동에 과도하게 집중하거나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것. 이로 인해 나타나는 부족한 경제관념은 성인 ADHD 대다수가 겪는 문제들이다. 성인과 미성년자 ADHD 환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보호자의 부재’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성인 ADHD 환자는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이 더욱 많을 수밖에 없다.

의학계는 물론, 본인조차 ADHD임을 인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런 ‘사회적 무지’는 애써 일상을 버티는 환자들을 무너뜨리는 요인이기도 하다. 한국어 강사 시절, 민씨는 수년간 외국인 학생들의 ‘뒷담화’가 촉발제가 돼 1년간 공황증세를 알았다. 민씨는 “‘역량도 안 되면서, 이것저것 하려고 한다’던 말에 수치심이 몰려왔다”고 했다.

40대 ADHD 환자이자, ADHD를 가진 9살 딸의 엄마이기도 한 박씨도 지난해 우울증을 앓았다. 유전적 영향이 절대적인 ADHD 특성상 박씨 같은 사례는 적지 않다. 집안일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해 식탁에 늘 그릇을 쌓아두고 있다는 박씨는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반항하는 딸을 돌보기가 쉽지 않아, ‘난 틀린 부모’란 생각에 우울증이 왔다”고 털어놨다.

반건호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성인 ADHD는 방치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서의 갈등이 누적되면서 우울증, 자존감 저하, 술·담배 남용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보다 앞서 1970년대부터 성인 ADHD 관련 연구를 시작한 해외에선 이들에 대한 지원이 비교적 잘 마련된 편이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비영리단체 ‘ADHD 아동과 성인을 위한 단체(CHADD)’다. CHADD는 성인 ADHD 환자를 위한 돈·시간 관리 방법, 주거 마련 방법, 맞춤형 대학 진학 방법 등에 대한 교육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선 2000년에 들어서야 연구가 시작돼 전문의조차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성인 ADHD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도 오진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종일정신건강의학과의원 이종일 원장은 “여전히 국내엔 성인 ADHD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의사들도 많다”고 했다.

민씨 역시 병원 여러곳을 전전하며 우울증 진단을 받기도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한 상담센터에서 11회차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민바람씨는 변하지 않을 것 같네요”란 말을 듣고 좌절한 적도 있다. 8년 만에 ADHD 전문 병원을 찾은 민씨는 “‘내 괴로움에 이름이 있었다니’라는 생각에 입을 틀어막았다”고 했다.

ADHD는 ‘양날의 검’과 같다. 방치기간이 길어질수록 위험하지만, 제때 인지해 치료를 받는다면 ‘장점’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 원장은 “ADHD라고 해서 비정상이라고만 치부할 순 없고, 약물치료 등을 통해 주의력을 본인에게 맞는 수준으로 관리만 하면 된다. 완치 개념이 없고 본인이 관리를 해나가는 것”며 “오히려 풍부한 상상력이나 활동성을 직업적 장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반 교수도 “ADHD를 방치하면 대인관계 문제, 자존감 저하, 술·담배 남용 문제로 이어질 수 있어 위험하지만 남보다 에너지가 많다는 지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고유한 특징이자 장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박혜원 기자

k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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