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측 실패하면 평판 훼손” 우려
“선순위채까지 규모 보고해라” 이례적 요청
시장 분위기 풀려야…선제적 대응 차원
[헤럴드경제=서정은 기자] “(원화 채권뿐 아니라) 전반적인 채권 발행도 자제해라. 자금 조달 규모를 적어 계획서 내라.”
은행채 발행과 수신금리 경쟁 자제를 요청했던 금융당국이 물론 자금조달 시기와 방법까지 일일이 보고받고 있다. 우리나라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 평균이 높아진 상태에서 일부 금융사들이 무리하게 채권 발행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평판 리스크로 번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24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금융감독원은 각 지주와 은행들에 이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아주 시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리한 자금 조달을 자제하라는 얘기다. 또 각 금융지주사에 올해말까지 선순위채까지 조달 규모 등을 담은 내용을 보고할 것을 요구한 상태다.
은행 및 지주 관계자들은 “외화채 발행 자제 메시지를 전달받은 것은 물론 선순위채까지 조달 계획을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통상 금감원 실무자가 직접 연락와 선순위채까지 체크한 적은 없었는데, 조달 규모까지 특정해 세부적으로 보고하라는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현재 4대 금융지주는 내년 1월 중 국내에서 신종자본증권 발행 계획을 잡고 있다.
금감원이 은행 및 지주사에 이 같은 메시지를 던진 건 채권시장 경색과 ‘역머니무브’가 맞물려 시장 왜곡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이달 들어 당국은 수차례 은행권과 미팅을 갖고 과도한 자금 경쟁 확보를 멈추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수신금리를 올릴 경우 결국 대출금리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은행권은 채권시장의 구축효과를 막기 위해 은행채 발행도 ‘일시멈춤’ 상태다.
금감원이 각종 조달에 대한 언급을 한 건 대내외 평판 리스크를 고려한 조치다. 최근 레고랜드 사태와 흥국생명 콜옵션 미행사 이슈로 해외 시장에서는 국내 외화채에 대한 부정적인 기류가 높아진 상태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만약에 과도하게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하려고 하면 해외 기관투자자들 입장에서는 한국 시장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사들이 충분히 자본 버퍼를 쌓아둔 상황이라면 불필요하게 자금조달을 해 시장 혼란을 부추기지 말라는 얘기다.
이달 초 신한은행이 3600억원 규모로 캥거루본드 발행에 성공했으나, 가산금리를 195베이시스포인트(bp)로 책정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올해 초 발행한 채권 가산금리가 90~100bp였던 것을 고려하면, 리스크 비용이 두 배가량 늘어난 셈이다. 통상 채권 발행을 위한 맨데이트(mandate) 발표 후부터 발행까지 1주일이 걸렸던 것과 달리 신한은행 또한 2주 가까이 소요됐다. 하나은행은 북빌딩(수요예측) 과정에서 시장과의 눈높이 차이로 투자자 모집을 연기했다.
당국이 이번에 자금 조달 규모와 시기를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 또한 시장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내년 상반기 이후 금리 인상 속도를 줄이고, 시장 경색이 풀린다면 그 후에 금융사들이 여유있게 자금을 조달해도 늦지 않다는 얘기다.
금감원 관계자는 “금융사들이 채권을 발행해 한번에 물량을 쏟아내면 시장이 이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을 할 수 있으니, 이를 면밀하게 모니터링하는 차원으로 이해해달라”며 “미리 모니터링을 해야 선제대응이 가능하다는 취지고, 불가피할 경우 충분히 자금 조달을 할 수는 있지만 특정일이나 시기에는 몰리지 말라는 의미로 계획서를 받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금 조달 자체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는 금융당국의 설명에도 금융사들은 당혹스러운 입장이다. 금융지주 관계자는 “코로나19 지원부터 정부의 유동성 공급 정책까지 충실히 하는 것은 물론 은행채 발행을 멈추고 수신금리까지 못 올리는 상황”이라며 “취지는 알겠으나, 연일 여러 메시지가 나오면서 시장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 자금 조달 수단을 막겠다는 의중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lucky@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