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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울림] 가족을 향한 애타는 그리움에 결국 무너져버린...사랑꾼 이중섭
전쟁통에 급박하게 월남 고된 피난생활
아내와 아이들 일본 보내고 부산에 남아
53년 일주일 간의 짧은 해후 끝에 귀국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고국에서 눈 감아
MMCA 특별전 ‘현해탄’에 절절한 묘사
〈현해탄〉 1954년, 종이에 펜 유채 크레용, 13.7×21.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건희 기증 [MMCA제공]

일반인의 시각으로 미술을 바라보고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이한빛 기자가 작품에 엮인 뒷이야기를 풀어냅니다. 한국미술의 주요 거장부터 신진작가에 이르기까지 대상은 다양하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모두 지금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라는 것입니다. 흥미롭게 읽으셨다면, 지금입니다. 작품을 만나러 갈 시간입니다. 〈편집자 주〉

이중섭은 사랑꾼이었다. 그는 대학 1년 후배로 만난 아내를 사랑했고, 쉽지 않았던 그와의 결혼에서 얻은 아이들을 귀애(貴愛)했다.

한국전쟁은 평범한 일상을 앗아갔다. 원산에 살던 작가는 전쟁이 터지자 아내와 두 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간다. 정말 ‘잠시’ 떠났다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모든 작품을 고향에 두고 떠났다. 오일팔레트 하나만 들고 피난길에 올랐던 이중섭 가족은 극한의 생활고에 시달렸다. 부산에서 생활도 잠시, 51년 봄 서귀포에 정착해 그해 말까지 가족과 함께 제주에 자리잡는다. 약간의 배급식량 밖에 의존할 곳이 없었기에 바닷가에서 해초나 게 등을 잡아 끼니를 떼웠다. 아내 이남덕 여사는 1986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이중섭30주기 유작전에서 “제주도시절에 어찌나 먹을것이 달리던지 매일 바닷가에 나가 게나 조개를 잡아다 먹었는데 주인(중섭)은 그것이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그 게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게를 그린다고 말하곤 했지요”(구상, 내가 아는 이중섭5, 중앙일보, 1986.07.12)라고 회고한다.

제주에서의 약 1년간 생활은 물론 궁핍했지만, 가족과 함께 했기에 온전했다. 전쟁과는 동 떨어진 서귀포 바닷가, 아이들은 벌거벗은 채 고기와 게를 잡고 놀았다. 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중섭 작품의 주요 소재인 아이들과 물고기, 게, 가족은 서귀포라는 공간에서 자연스레 재탄생 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바닷가를 드나들던 작가의 눈에 바닷가에서 고망낚시를 하는 서귀포 아이들은 그림의 영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평화로웠던 제주 생활도 잠시, 52년 폐결핵에 걸린 이남덕은 부친의 부고에 두 아이와 함께 부산의 일본인 수용소를 거쳐 친정집이 있는 도쿄로 떠난다. 여권문제로 함께 가지 못했던 이중섭은 이후 가족과 만날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큰 슬픔에 빠진다. 53년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저 그대를 만나는 희망 하나로 안간힘으로 팽팽히 버티고 있소”(이중섭 서한집 - 그릴 수 없는 사랑의 빛깔까지도, 한국문학사, 1980. p.40)이라고 고백하다가도 “몇번이나 사흘에 한 통씩은 편지를 하라고 했는데도 왜 골치아픈 이야기만 써 보내는 거요...반년간이나 사흘에 한 통씩 편지를 애원하다시피했는데 그래 몇 번이나 내 소원대로 편지를 보냈다 생각하시오?”(같은책, p.52)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그리움과 불안함은 작가의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그러다 1953년 7월, 구상의 도움으로 이중섭은 가족을 만나러 간다. 지산만씨에게 선원증을 얻어 일본으로 떠난 그는 사실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주변인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했고, 지인들도 그가 가족들과 만나 정착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변의 기대가 무색하게, 약 3주만에 이중섭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왜 그토록 바라던 가족을 두고 다시 현해탄을 건너 돌아와야만 했을까. 현실적으로는 적법한 서류가 선원증이라 오래 머무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지만, 불법체류도 불가능한 옵션은 아니었을 것이다.

박고석 화백은 이중섭 작품집(1972, 현대화랑)에 ‘이중섭을 가질 수 있었던 행운’이라는 글에서 “중섭의 성품으로 보아 배를 어렵게 빌어타고 왔다는 등 당분간 처가 신세를 져야겠으니 잘 부탁한다는 등의 말은 뻔뻔스러워 못할노릇 아니겠는가도 생각해 보았다. ... 자기혼자 일본 땅에서 그것도 처가에서 호강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심정이 강하게 작용했으리라 나는 믿는다”고 짐작한다. 이중섭 본인이 처가에 떳떳한 예술가가 되어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박고석은 같은 글에서 “개인전의 소망을 이야기 했고 그림이 팔리게 되면 (떳떳하게)일본을 한 번 가봐야겠다는 소원을 말하기도 했다”고 서술한다. 아내에게 당당한, 아이들에게 부족함 없는 아버지이고 싶었던 한 사내의 마음이 절절하다.

열정적으로 전시를 준비했으나, 전시의 성공과 달리 판매대금은 수급이 원활치 않았다. 두 번이나 같은 상황에 처한 작가는 결국 삶의 의지가 꺾여버리고 만다. 가족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공포가 그를 쫓아왔다. 자포자기 상태의 작가는 거식증과 정신이상에 시달리다 결국 1956년 9월 6일 간질환의 악화로 적십자 병동의 무료병동에서 연고자 없이 사망한다.

이번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전에 나온 ‘현해탄’은 1953년 짧게 가족과 해후 한 뒤, 다시 일본에 금의환향 하겠다며 희망에 차 개인전을 준비하던 1954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같은 도상의 세로 작품은 제주도 이중섭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건희 컬렉션이다. 너울이 치는 현해탄 너머엔 아내와 가족이 있고, 작가는 작은 쪽배를 타고 이를 건너가려하고 있다.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가족은 크게, 바다에서 그들을 그리워하는 자신은 작게 그렸다. 그래도 가족과 연결된 끈 덕택에 막막하고 한탄스러운 상황이지만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읽힌다. 이야기의 결말을 아는 우리는 조금은 복잡한 마음으로 작가의 마음을 더듬게 된다. 사랑꾼 이중섭을 만날수 있는 이 전시는 내년 4월 23일까지다.

이한빛 기자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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