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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년 만에 ‘경비실 에어컨 설치’ 기대했는데…“전기세 든다”며 무산 [잔인했던 여름, 그 후]
‘폭염’ 한창 때 관심 받다가
여름 저무니 자연스레 ‘논의 실종’
비용 앞에 무너지는 ‘에어컨 설치’
지난 8월 방문한 경기도 고양시 일산 모 아파트 경비실. 경비원 이모 (77)씨는 22년째 에어컨 없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매년 무더위가 심해진다는 걸 느낀다는 이씨는 "온몸에 땀이 젖는 건 일상"이라고 말했다. 박혜원 기자

[헤럴드경제=박혜원·김빛나 기자] 경기도 일산 모 아파트 경비원 이모(77) 씨의 올여름은 ‘혹시나’로 시작했다가 ‘역시나’로 끝났다. 22년 만에 경비실 에어컨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무산됐기 때문이다. 이씨는 “7월에 동대표회의에서 설치하기로 결론 난 걸로 알고 있는데 결국 안 됐다”며 “전기세 때문에 내부 반발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1평 남짓한 경비실에서 24시간 격일 근무를 하는 이씨는 선풍기 한 대와 주민들이 버린 작은 선풍기 2대로 이번 여름을 났다.

이씨는 “날이 더우니까 도시락도 잘 쉰다”며 “원래는 큰 냉장고가 있었는데, 전기세가 많이 든다는 주민들의 항의로 크기가 작아졌다”고 말했다.

지난 여름은 평년보다 덥고, 폭염 일수가 많았지만 올해도 노동자의 ‘에어컨 설치’는 언감생심이었다. 더위를 견디도록 에어컨을 제공해달라는 요구는 ‘비용’과 ‘효율’ 앞에 쉽게 무너졌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지난 5월 20일부터 7월 말까지 온열환자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60명 증가했다. 폭염으로 노동자의 근무 환경은 날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지만 뾰족한 해법은 나오지 않고 있다.

지난 8월 방문한 경기도 고양시 일산 모 아파트 경비실. 경비원 이모 (77)씨는 22년째 에어컨 없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매년 무더위가 심해진다는 걸 느낀다는 이씨는 "온몸에 땀이 젖는 건 일상"이라고 말했다. 박혜원 기자

경비원 이씨의 아파트가 쉽게 에어컨 설치가 어려운 이유도 비용 때문이다. 경기도는 경비원 에어컨 설치비 지원금을 자치구에서 자율적으로 제공해, 지원금이 낮은 자치구 주민들은 선뜻 에어컨 설치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이씨가 일하는 아파트 내 다른 경비원 박모(74) 씨는 “선풍기로 여름을 겨우 나는데, 에어컨을 설치하면 좋을 것”이라면서도 “근무시간 중 절반 가량을 밖에 나가는데 에어컨을 껐다, 켰다 하면 전기료가 많이 나오니 불만이 생기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씨는 체념한 듯 “여름에 온몸이 땀으로 젖는 건 일상”이라며 “퇴직하기 전에 에어컨이 설치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올여름 그 누구보다 에어컨 설치를 원했던 물류센터 노동자들의 요구도 사실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쿠팡 고양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40대 A씨는 지난 여름을 “분노스럽고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A씨는 “출고공정 중 포장팀이 있는 곳은 기온이 섭씨 40도를 가뿐히 넘고, 습도도 50%까지 오른다”며 “출고 포장라인에 들어서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따가웠다”고 말했다.

노조 측은 에어컨 없는 근무 환경이 업무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이다. 정동헌 민주노총 쿠팡물류센터지회 분회장은 “폭염이 심했던 지난 7월 직원이 쓰러지거나 119 출동을 본 사례가 3건”이라며 “중간에 조퇴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집계되지 않는 것까지 합하면 더 많다”고 주장했다.

반면 물류센터 관계자는 “차가 드나들도록 개방된 곳이라 에어컨 설치가 효율적이지 않다”는 입장이다. 쿠팡은 자사 뉴스룸을 통해 “고용노동부는 온열질환 예방을 위한 가이드라인 등에서 선풍기, 에어 서큘레이터와 같은 냉풍기와 공기순환장치를 냉방장치의 예시로 제시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는 에어컨이 없으면 냉방장치가 없다는 식의 허위 주장을 하고 있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노동자의 근로환경을 보장하기 위해 고용주의 열린 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재각 기후정의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폭염을 산업 재해 일환으로 포함해야 경각심을 가질 것”이라며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수용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klee@heraldcorp.com
binn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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