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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빈 분리파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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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그림,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그림,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그림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연인(키스·일부 확대), 1907~1908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장관님. 이건 그림이 아니에요. 우리를 향한 도발, 진리에 대한 조롱입니다. 전시는커녕 불태워야 해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겁니다!"

1900년대 초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 리터 폰 하르텔 당시 오스트리아 교육부 장관이 교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교수들이 그의 길을 막습니다. "장관님. 도대체 이 미치광이 화가를 감싸는 이유가 뭡니까. 진리의 상아탑을 불경의 상아탑, 누드의 상아탑으로 만드실 겁니까?" 장관을 둘러싼 교수들이 고함칩니다.

"이 화가가 우리 대학, 우리 학문을 모욕하는 일을 묵과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하는 교수 87명의 성명서요. 이번에는 못 본 척 말고 총장과 잘 상의해보시오. 이 사업은 폐기처분 감이야!"

가장 나이 든 교수가 장관에게 두꺼운 종이 뭉치를 던지듯 안깁니다. 장관은 신경질적으로 코를 긁습니다. '눈치껏 적당히 좀 하라니까, 이놈의 화가를 진짜…!' 혼잣말하며 한숨을 길게 쉽니다.

원래 이렇게까지 파문이 생길 일은 아니었습니다.

밋밋한 빈 대학교 대강당에 천장화를 남기려고 했을 뿐인데요. 이 화가를 부른 게 화근이었습니다. 가끔씩 상상초월의 야한 그림을 그리는 통에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실력만은 최고였거든요. 전통과 역사의 국립 대학교입니다. 어설픈 화가에게 맡기느니 안 하는 게 나았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인 이 화가는 '철학', '의학', '법학'을 주제로 붓을 듭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철학

그리고 '철학'을 상징하는 스케치부터 그린 후 선공개합니다. 이날 대학이 뒤집어집니다. 그림 속 벌거벗은 사람들이 고뇌에 둘러싸여 괴로워합니다. 불길함의 상징인 스핑크스가 외려 평온한 표정을 짓습니다. 대학 사람들은 빛나는 이성을 앞세워 진리를 찾는 우리네 모습을 그려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의 ‘아테네 학당’ 같은 작품을 상상한 겁니다. 그림을 본 이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저래?"라며 손가락질합니다.

"저 화가, 좀 싸한데요?"라는 말이 돌 때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한 게 교육부 장관이었지요.

"아직 주문한 그림이 두 개 남았잖습니까. 좀 지켜봅시다." 진땀을 빼며 이 화가를 후원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그림 '의학', 마지막 그림 '법학' 스케치도 문제작이 돼 도마 위에 오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의학
구스타프 클림트, 법학

의학이 추구하는 삶을 미뤄두고 죽음을 부각시켰다는, 법학이 지향하는 정의를 표현하지 않고 죄악을 신랄하게 띄웠다는 논란에 휘말립니다. 이제 대학교수들 틈에선 "저 화가 학벌이 별로지 않아? 우리가 자기보다 잘났으니 열등감을 내보이는 거야?"라는 말까지 돕니다.

일각에선 이 화가를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진리 앞에서 자만하지 말라는 뜻", "자기네들을 멋있게 그리지 않았다고 몽니를 부린다"라는 주장이었지만, 흐름을 바꾸기엔 미약했습니다.

"제발 좀, 적당히 좀 해달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쾅! 장관이 이 화가의 작업실에 찾아가 책상을 칩니다. "교수 78명의 성명이오. 나도 더는 어쩔 수 없소. 자네 그림은 천으로 가려질 처지에 놓였소. 이 세상 빛을 볼 수 없다는 뜻이야!" 장관이 성명서 뭉치를 거칠게 내려놓습니다.

"장관님. 제가 이 구상에 매달린 게 몇 년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돌아오는 결과물이 이것입니까?"

이 화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뜹니다. "이 사람아. 나도 알아. 당신의 테크닉은 세계 최고 수준인 걸. 자네는 빈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기록될 거야. 하지만 때로는 시대의 눈치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장관이 씩씩댑니다.

"어디까지 수준을 낮춰야 합니까? 그놈의 눈치를 본 게 그 정도란 말입니다! 앞으로…. 앞으로 절대 저에게 그 어떤 의뢰도 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는 정말로 제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겠습니다."

이 화가도 지지 않습니다. "아니, 이보게…." 장관은 당황합니다. 이 정도의 파격 선언을 할 줄은 몰랐던 겁니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화가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공간의 기류가 순식간에 뒤집혔지만, 이들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 화가의 이름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입니다. 자신의 걸작이 홀대받는 일에 충격을 받은 클림트는 세 작품을 모두 회수합니다. "나는 검열을 너무 많이 받았다.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자유롭기를 바란다. 내 작품을 가로막는 그런 불쾌한, 하찮은 것들을 벗어버리고 자유를 회복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은둔의 화가로 삽니다. 거침없이 자기만의 그림을 만들어갑니다. 이 덕분에, 우리에겐 각성(覺醒)한 빈 분리파 선구자의 빛나는 역작을 볼 수 있는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감미로우면서 애절하게, 아름다운데도 서글프게
구스타프 클림트, 연인(키스), 1907~1908

한 쌍의 남녀가 포옹합니다.

남성이 여성의 뺨에 입을 댑니다. 양손으로 여성의 얼굴을 부드럽게 안고 있습니다. 두 눈을 감은 여성은 이 느낌을 음미합니다. 왼손으로 남성의 손을 쥐고, 오른손으로 남성의 목덜미를 끌어안았습니다. 황금빛 덩굴이 걸린 여성의 발목은 입맞춤의 전율에 취한 듯 비틀어져 있습니다. 이들의 옷은 모두 금빛입니다. 배경에도 금빛 은하수가 한없이 깔렸습니다. 장소는 노란색과 보라색, 연두색 등의 수백 송이 꽃과 풀이 흩뿌려진 벼랑 위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연인(키스·일부 확대), 1907~1908

남성의 창백한 얼굴과 손, 여성의 핏기 없는 모습은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누구인지, 또 언제, 어디에서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지에 대한 단서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현실이 아닌 꿈 혹은 상상, 우주 같은 저세상에 있는 양 느껴집니다. 입맞춤의 그 순간 이들의 눈 앞에 펼쳐진 환상 같기도 합니다. 남성이 걸친 검은색과 흰색, 회색 조의 네모 패턴과 여성을 감싼 빨간색과 파란색 톤 등 동그라미 패턴도 너무 정교한 나머지 비현실성을 더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연인(키스·일부 확대), 1907~1908
구스타프 클림트, 연인(키스·일부 확대), 1907~1908
구스타프 클림트, 연인(키스·일부 확대), 1907~1908

감미로우면서 애절하고, 아름다운데도 서글퍼집니다.

첫사랑 같기도, 금지된 사랑 같기도 합니다. 영국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가 쓴 소설 '폭풍의 언덕'의 한 구절도 떠오릅니다. '다시 한번 저 여자를 이 팔로 안아보자. 만약 그녀의 몸이 차면 북풍 때문에 내 몸이 차가워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잠들어 그런 것으로 생각하자.'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싸늘해진 옛사랑을 끌어안으면서 하는 혼잣말입니다.

이 그림에는 천일야화(千一夜話) 속 등장하는 셰에라자드도 놀랄 만큼 절절한 사연이 있을 듯도 합니다.

사랑의 시작과 끝을 암시하는 건지, 화사한 꽃밭과 아슬아슬한 절벽을 같이 그린 이유도 궁금해집니다. 클림트연인(키스)입니다.

그 시대 주류에 맞서 ‘분리’를 택하다

클림트는 이른바 빈 분리파선구자입니다.

클림트는 189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꾸려진 이 '문제아들' 모임의 초대 회장이었지요. 에로틱한 그림, 파격적인 화풍으로 명성(?)을 떨친 그였기에, "빈에서 당신만큼 분리파를 이끌 사람이 없다!"며 추대받은 겁니다. 건축가 오토 바그너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클림트의 제자 에곤 실레오스카 코코슈카 등이 핵심 회원이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피아노 앞의 슈베르트

그렇다면 빈 분리파는 어떤 단체였을까요.

빈 분리파는 "인간의 내면을 제대로 그려보자!"는 목적을 갖는 예술가의 결성체입니다. 함께 공유하는 특정한 예술 양식은 없습니다.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을 구호로 외친 이들은 틀을 깬 자유로운 표현이면 다 인정합니다. 어쨌거나 규정, 규율 등 전통을 앞세우는 보수주의 화풍만 몰아내면 된다는 기조였습니다. 클림트는 "해외 미술과의 지속적인 접촉과 순수한 목적의 미술 구성, 공공단체들의 새로운 미술에 대한 관심 촉구"로 압축되는 선언문을 제시합니다. 고루함을 찬양하는 아카데미 중심 교육, 자유와 교류를 핍박하는 관 주도의 전시회 따위는 다 필요 없다는 겁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일부)
구스타프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일부)

그러니까, '분리'(分離)의 뜻을 그대로 품으면 됩니다.

"우리는 낡고 판에 박힌 옛 화풍과는 '분리'되겠다!"는 겁니다. 분리파(Secession)라는 말 자체는 '분리된 서민'(secessio plebis)이란 뜻의 라틴어에서 따온 겁니다. 로마사를 보면 귀족계급(Partiscius)의 지배에 불만을 가진 서민계급(Plebis)이 새로운 저항 집단을 꾸리는 행동 자체를 '분리'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이 중구난방처럼 느껴지는 빈 분리파가 미술사에 남긴 흔적은 진합니다.

무엇보다 미술의 대중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빈 분리파는 1898년 1월에 잡지 '성스러운 봄'(Ver Sacrum)을 펴내 자신들의 자유로운 사상을 알립니다. 2개월 후인 3월부터는 전시회도 엽니다. 젊고 재능만 있다면 예외 없이 전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일본 미술전, 인상주의 미술전 등 해외의 주목받는 미술 화풍도 성실히 소개했습니다. 자기네들의 작품도 이웃 나라에 열심히 알렸습니다. 늘 주류였던 아카데미 인사들은 뒤로 밀어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제1회 빈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일부).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의 격투 장면이 담겨있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를 각각 어디에 빗댔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무모해보였던 빈 분리파는 화제 몰이에 성공합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문제아들 모임이었지만 실력과 감각에선 모두 '어벤져스'였습니다. 제1회 빈 분리파 전에 6만여 명이 다녀갔다는 말이 나올 만큼 '대박'이 터집니다. 어느 정도 부침은 있었지만, 이들은 그 자체로 신드롬이 됩니다.

그간 주류 미술은 이탈리아,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 몇몇 나라를 중심으로 발전했는데요.

특히 그 시절 빈은 예술의 변화를 따라가는데 유독 늦은 도시였습니다. 1900년대 초까지도 인구 200만 대도시인 빈 시민들은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폴 세잔 등 회화계 혁명가들의 이름을 낯설어했습니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뒤처지는 빈을 놓고 "세계가 종말을 맞을 때 나는 빈으로 돌아갈 거야. 그 도시는 모든 게 20년 늦게 일어나거든!"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프리데리케 마리아 베어의 초상

이런 불모지와 같은 빈에서 빈 분리파는 "많이 늦은 것 인정. 우리가 '파리지앵'만큼 우아하지 않은 것도 인정. 그런데도 주류에 한 방 먹일 수 있네?"라는 점을 증명합니다.

사실 빈 분리파 전후로 모나코 분리파, 베를린 분리파 등 유럽 곳곳에서 분리파가 꾸려져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들 또한 '전통과의 분리'가 핵심 기조였습니다. 빈 분리파의 성공은 이 집단들을 자극합니다. 나비 효과를 부릅니다. 이들도 "심지어 쟤들조차 하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게 뭐야? 어쩌면 우리야말로 파리를 앞지를 수 있겠다!"는 꿈을 꿉니다.

유럽 각지에서 갖은 예술적 도전이 폭발적으로 펼쳐집니다.

이 과정에서 더 많은 대중이 미술을 접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빈 분리파 덕에 빈 또한 음악의 도시를 넘어 진정한 예술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에곤 실레, 죽음과 소녀
오스카 코코슈카, The Bride of the Wind

빈 분리파는 뜻하지 않게 대중미술의 고급화도 주도하는데요.

역사상 손꼽히는 테크닉을 가진 '천재 중의 천재' 클림트가 수장입니다. 이미 천상계에 있던 양반입니다. 개성이 넘치다 못해 뚝뚝 흐르는 실레와 코코슈카 등 '사기캐'가 일반 회원 정도였습니다.

클림트 등 빈 분리파 사람들의 그림 중 상당수는 주제에서 논란을 불렀지만, 그렇다고 "작품성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협력자와 경쟁자가 알게 모르게 느낀 압박감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모차르트를 보는 살리에리가 된 듯했을 겁니다. 하지만 클림트 같은 '넘사벽' 감각을 갖춘 괴물과 맞붙으며 대중을 공략하다 보니 실력은 자연스럽게 좋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클림트가 이룬 성과를 보면요. 가끔은 신이 파리 독주 체제의 그 시절 유럽 도시들의 '미술 밸런스'를 맞추려고 그를 빈에 보낸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말 그대로 ‘눈부신’ 작품성으로 압도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907

클림트의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입니다.

2006년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약 1620억원)로 낙찰된 작품입니다. 그 시절 기성 화단과 '분리'돼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클림트뿐이었습니다. 강렬하지요. 여성의 얼굴과 손, 어깨만 사실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창백한 피부의 여성은 여려 보입니다. 다만 살짝 벌어진 채 튀어나온 입술과 훤히 드러난 쇄골, 목과 손목 등에 걸친 화려한 장신구에서 자존심이 묻어납니다.

그림의 나머지 부분에는 온갖 장식과 패턴을 쏟아부었습니다.

"예쁘게 그리는 건 잘 모르겠고, 이 그림이 어디 걸려있든 제일 눈에 띄도록 만들어주겠다!"고 작정한 마음이 생생히 와닿습니다.

화려함에 눈이 아플 정도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습니다.

외려 그림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델레의 남편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설탕 재벌이었습니다. 클림트는 자신을 후원한 이 부부를 위해 그림을 그린 뒤 선물했습니다. 그 시절 빈의 부자들은 아내나 딸의 초상화를 남기는 게 유행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일부 확대), 1907

그림 속 아델레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싼 상태입니다.

아델레는 어릴 적 사고 후유증으로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크게 다쳤는데, 클림트가 이를 알고 배려한 겁니다. 이 그림은 2015년에 상영된 영화 '우먼 인 골드'(금빛 여인·The Woman in Gold)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이 그림의 '진짜 주인'을 찾는 여정이 담긴 작품입니다. 금빛 여인이란 아돌프 히틀러가 이 작품을 몰수한 뒤 제멋대로 바꾼 이름이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도 흥미롭습니다.

전쟁 상황에서 적장(敵將)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 고국을 구한 유디트(6월 11일자 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참고)를 퇴폐미 가득한 요부로 표현한 겁니다.

매혹적인 눈빛의 유디트가 자기 상반신을 거의 다 드러냅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옷과 장신구, 럭셔리한 나무 배경, 우아하게 들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이 황홀감과 아찔함을 함께 안겨줍니다. 이 또한 당시 빈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클림트만이 그릴 수 있는 '외딴섬'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이 그림도 아델레가 모델이었습니다.

타고난 화가, ‘정점’ 찍고 ‘반항’ 시작하다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는 타고난 화가였습니다.

과장을 좀 하자면 붓을 쥔 순간부터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구성도 잘 짰고, 센스도 좋았습니다. 이런 재능을 갖는 화가는 미술사를 통틀어도 흔치 않습니다. 그저 여성과 금박, 살구색의 야한 그림만 좋아한 게 아니었던 겁니다.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처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습니다.

눈 떠보니 아버지가 금 세공사였지요. 그림에 왜 그렇게 금색을 칠했는지 짐작됩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본 금빛에서 아름다움을 느꼈을 겁니다. 클림트는 1876년에 우연찮은 기회로 빈의 국립 응용미술 학교에 입학합니다. 아버지가 경제력은 없었나 봅니다. 클림트의 집안은 궁핍했습니다. 14살 무렵 일반 학교까지 그만둬야 했습니다. 이 와중에 친척 중 한 명이 클림트의 드로잉을 봅니다. 그의 도움 덕에 '오히려 좋아!"의 상황을 맞고,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접하게 된 겁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조용한 호수

클림트는 빈의 고리타분한 미술 양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입니다.

1883년에 졸업한 클림트는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동료 프란츠 마치 등과 공방을 차립니다. 주로 건물 벽면을 위한 사실적 화풍의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클림트는 20대 후반쯤부터 빈에 있는 그 누구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경지에 오릅니다. 보통 화가라면 평생을 쏟아 겨우 쌓을 성과였습니다.

클림트는 그 세계에서 지루함을 느낀 듯합니다.

그 결과 빈 분리파가 꾸려졌습니다. 클림트가 행한 반항의 결과였습니다. 클림트는 점점 더 외설스러운 그림을 그립니다. 논란이 될 게 뻔한 파격적인 작품을 들고 옵니다. 이런 그림들이 욕을 엄청나게 먹은 건 맞지만 그의 독창성에 추종자도 수없이 따라붙었습니다. 그 결과 빈 분리파는 빈 내 최대 규모의 반항아들 집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클림트가 아닌 어설프게 실력 좋은 화가가 이랬으면요. 빈 분리파의 수장은커녕 변태라며 매장됐을 겁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다나에
구스타프 클림트, 생명의 나무

그런 클림트는 1900년 자신의 걸작이 처한 상황을 보고 마지막 봉인을 풀어버립니다.

클림트는 그 해 이후 더는 공공 작품을 의뢰받지 않습니다. 사실상 "앞으로는 정말로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빈 대학교 천장화 파문을 겪은 직후에 한 다짐이었지요. 클림트는 한풀이하는 사람처럼 금장식과 온갖 패턴, 기하학적 추상 양식을 쏟아붓습니다. 이 덕분에 키스, 유디트와 함께 다나에(1907~1908), 생명의 나무(1905~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를 열고 대작을 찍어냅니다.

그림만큼 에로틱한 삶, ‘키스’ 모델 정체는?

클림트가 은둔의 삶을 산 건 맞는데요.

조용한 삶을 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클림트는 여성을 좋아했습니다. 아주 많이 좋아했습니다. 클림트가 죽은 후 사생아를 낳은 여자들이 생계 부양비를 청구한 소송만 14건 이상입니다. 클림트가 여성들과 얼마나 자유롭게 관계를 맺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클림트는 자신의 그림만큼 에로틱했습니다.

평생 결혼은 하지 않은 클림트에게 '빈의 카사노바', '희대의 바람둥이'라는 말이 끝까지 따라붙습니다. "클림트의 그림 모델이 된 여성은 하나같이 그 양반과 그렇고 그런 사이더라"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게 있지요.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2,

클림트 필생의 역작인 '키스'의 모델은 누구냐는 겁니다. 주장은 엇갈립니다. 앞서 소개한 아델레 부인은 클림트가 죽은 후 "'키스'는 나를 모델로 그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목소리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은 그림 속 여성의 오른손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는 점을 함께 주목합니다. 아델레의 초상화처럼, 이 그림에서도 그녀의 '콤플렉스'를 배려했다는 겁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밀리 플뢰게

하지만 또 다른 여성인 에밀리 플뢰게가 진짜 모델일 것이라는 의견도 상당합니다.

지금은 에밀리가 '키스'의 모델이었다는 게 정설처럼 통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요. 에밀리는 클림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영혼을 담아 그렸다면 필시 에밀리다!"라는 겁니다.

에밀리는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와 결혼한 아내의 여동생입니다.

클림트는 플뢰게보다 12살 연상입니다. 클림트는 그런 에밀리를 때로는 친동생처럼, 가끔은 딸처럼 대하며 아꼈습니다. 17살 때 클림트를 만난 에밀리도 그를 그림자처럼 따랐습니다. 휴가와 사교모임 등 사적 일정 대부분에 동행할 수준이었지요. 이 둘이 주고받은 엽서만 400여 통입니다. 그런 클림트가 에밀리와 관계가 멀어졌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그녀를 그리워하며 자신과 에밀리를 함께 그렸다는 겁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죽음과 삶

클림트는 56세 나이로 눈을 감는데요.

스페인 독감 악화에 따른 폐렴과 뇌경색 때문입니다. 클림트가 이 당시에도 "에밀리를 불러주세요"라고 말할 만큼 둘은 각별했습니다.

사실 클림트는 그 유명세와 비교해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은 편은 아닙니다.

클림트는 자기 자신이나 작품을 글로 쓰는 일에 "뱃멀미 같은 두려움이 다가온다"며 기록을 거부했습니다. 클림트는 그 흔한 자화상도 없습니다. 그는 화가라면 한두 점은 남긴다는 자화상을 왜 그리지 않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에게 관심이 있어요. 그보다 다른 형태에 대한 관심도 많습니다. 나는 내가 특별히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온종일 인물과 풍경, 가끔은 초상을 그리는 화가일 뿐입니다."

〈참고 문헌〉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민음사

서양 미술사, 에른스트 곰브리치, 예경

〈후암동 미술관 읽는 순서(연재 중)〉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3)‘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4)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5)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6)“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7)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8)“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9)‘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0)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1)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2)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빈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3)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4)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15)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16)“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17)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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