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빗물에 쓸려갈 뻔, 살아있어 감사”…슬픔 잠긴 구룡마을 [폭우가 할퀸 상처]
거세진 급류에 인근 판잣집 훼손
구룡마을 주민 200여명, 대피소 피신
“소방대원 밧줄 잡고 급류에서 빠져나와”
집 안에 고인 진흙·빗물 치우려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는 주민도
지난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의 집들이 지난 8일 내린 빗물로 급류가 거세지면서 심하게 훼손됐을 뿐 아니라 쓰레기더미가 급류에 휩쓸리고 있다. 김영철 기자

[헤럴드경제=김영철 기자] “집 안에 물이 침투한 정도가 아니에요. 빗물에 쓸려갈 뻔했는데 겨우 살았어요.”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 49년째 살고 있다는 방금순(68·여) 씨는 지난 8일 오후 9시30분께 집 안에 빗물이 차올라 구조 요청을 했다. 키 150㎝가 안 돼 보이는 방씨는 집 안에 빗물이 목까지 차자 급류에 쓸려가지 않기 위해 남편과 얼싸안고 버텼다고 했다. 그는 “다행히 구조대원들이 보내준 밧줄을 몸에 칭칭 감고 나서야 구사일생으로 구조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소방대원의 구조로 다행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방씨의 걱정은 이제부터다. 구룡마을에 있는, 자신이 운영하는 구멍가게도 피해가 막심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방씨는 “장사가 안돼 몇 년째 가게에서 술, 담배만 팔아 생계를 이어갔는데 (그곳도) 지금 난장판일 것”이라며 “하루빨리 함께 잔해를 치워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씁쓸해했다.

지난 8일부터 장시간 폭우가 쏟아져 전국 곳곳에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방씨 같은 구룡마을 주민은 순식간에 자신들의 거처를 잃어 슬픔에 잠긴 모습이 역력했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중 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전날 오후 발생한 폭우로 피해를 본 거주민 여럿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영철 기자

지난 9일 오후 헤럴드경제가 찾은 서울 강남구 구룡중 체육관엔 전날부터 구룡마을 주민을 위한 대피소가 설치됐다. 같은 날 오후 3시께 찾은 대피소에는 주민 200여명이 체육관에 깔린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자거나 대피소 관계자들이 나눠준 빵을 먹는 등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주민 대부분은 50대를 훌쩍 넘긴 중년층이나 노약자였다. 몇몇 주민은 서로 전날의 악몽을 공유하며 자신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아직 폭우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몇몇 주민은 구급차에 실려 대피소에 오기도 했다. 70대 여성 A씨는 “전날(8일) 비가 차올라 구급대원이 올 때까지 가구에 매달린 채 버텼다”면서도 전날의 악몽에 트라우마가 생긴 듯 손사래를 쳤다.

또 다른 거주민인 이모(65·여) 씨는 지난 8일 오후 10시께 몸에 차가운 느낌이 있어 화들짝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이씨의 집은 빗물로 이미 가득 찬 상태였다고 했다. 이씨는 “집 안이 물바다가 돼 있었고 이미 전기가 나간 상태였다”며 “충격에 사로잡혀 순간 멍하니 있다가 피해야 한다는 이웃 주민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어 이곳(대피소)까지 오게 됐다”고 털어놨다.

이와 관련해 서울 강남구청 관계자는 헤럴드경제와 만나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지만 대피 발령이 언제 해제될지는 모른다”며 “대피소에 있는 주민에게 아침·점심으로 속옷, 수건 등 구호물자와 생수, 음식 등 생필품을 지원하면서 불편이 없도록 최대한 조치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의 한 주택 모습. 폭우로 집안 곳곳에 진흙이 넘쳐나는 가운데 이 집에서 키우는 것으로 보이는 강아지 한 마리가 애처롭게 집 문앞에 앉아 있다. 김영철 기자

대피소 관계자에 따르면 시설을 방문한 몇몇 주민은 집 안에 고인 물을 빼내기 위해 구룡마을로 돌아갔다고 했다. 실제 헤럴드경제가 지난 9일 오후 4시30분께 찾아간 구룡마을에는 주민이 집 안에 남은 진흙과 물웅덩이를 정리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이날 구룡마을로 돌아가던 80대 여성 김모 씨는 “대피소에서 다시 올라오는 길이다. (집 안에) 고인 물을 퍼 나르러 왔다”고 말했다. 그는 “내 집 내가 치우지, 구청 사람들이 치워주겠냐”며 “아직 비도 안 그쳐서 집 안에 빗물이 계속 차오를 텐데 나 혼자 (대피소로) 피하면 상황이 해결되겠나. 최대한 치우고 늦게 대피소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폭우로 물살이 거칠어지면서 옆면이 뜯긴 판잣집이 속속들이 보였다. 판자와 담요로 뒤덮은 집들이 이번 폭우에 버티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진 것이다. 이곳 주민에 따르면 폭우로 물살이 가팔라지면서 물살에 인접한 집이 대부분 훼손됐다고 했다.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포클레인이 전날 폭우로 생긴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있다. 김영철 기자

“위쪽부터 쓰레기더미를 치우면 어떡해요? 아래쪽부터 치워야지.” 30분쯤 후인 오후 5시께 구룡마을 안쪽에서 거주민이 포클레인 기사에게 연신 소리치고 있었다. 주민은 쓰레기를 위에서부터 치우면 아래쪽 집들 주변에 또다시 쓰레기가 모여 물이 또 고이고 역류해 집 안에 물이 침투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포클레인을 통해 물줄기 속 쌓인 쓰레기더미를 치우는 광경을 보며 한 주민은 “빗물에 휩쓸린 잔해를 치울수록 건물이 더 무너져 내리는 것은 아닌지”라고 나직이 말하며 얼굴에 수심을 내비쳤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의 한 주택 내부에 폭우로 인해 물이 들어차 젖은 탓에 바닥 곳곳에 신문이 깔려 있다. 이외에도 지폐, 옷 등에 남아 있는 물기를 말리고자 공기청정기와 선풍기가 가동된 흔적이 보인다. 김영철 기자
지난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의 한 주민이 지난 8일 폭우로 흙범벅이 된 신발들을 씻기 위해 세숫대야에 담아놨다. 김영철 기자

비슷한 시각, 구룡마을의 한 주택 현관 앞엔 흙범벅이 된 신발 다섯 켤레가 대야에 담겨 있었다. 빗물에 젖은 옷과 지폐를 말리려고 집 안엔 선풍기·공기청정기 등이 켜져 있었다. 또 젖은 바닥을 말리려 곳곳엔 신문들이 깔려 있기도 했다. 이 집에 거주하는 이정자(58·여) 씨는 “자다가 벼락을 맞은 꼴”이라며 “어제(8일) 새벽부터 오늘(9일) 저녁까지 쉬지 않고 물을 밖으로 퍼 날랐다”고 하소연했다.

주민은 ‘다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앞으로 자연재해가 닥쳐올 때마다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주민은 구청 측의 수해 예방대책이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대피소에 있던 구룡마을 거주민 김재승(55) 씨는 “앞으로 이런 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튼튼한 건축물과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yckim6452@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