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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햄릿’ 박건형·박지연 “굳은살 도려내고 배우로의 시간 돌아보는 날들”
연극 ‘햄릿’ 막내 라인이자 남매
레어티즈 박건형ㆍ오필리어 박지연
 
연기 경력 60년의 선생님 배우들
존재만으로 배움과 성장의 시간

“홀린 듯 만나, 왜 하게 됐는지 이유 찾아
배우로의 시간 돌아보고 확인해” 
 
“내가 얕고 미천하다는 생각에 혼란…
굳은살 도려내고 새 살을 만나는 과정”
연극 ‘햄릿’의 막내 라인인 배우 박건형 박지연은 이 작품을 통해 “굳은살 도려내고 배우로의 시간 돌아보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유튜브에 ‘지옥’, ‘지옥소리’, ‘괴물소리’를 검색해봤어요.” (박지연)

실성한 오필리어는 핏기가 번진 눈을 하고 천둥 같은 소리를 냈다. “지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내라”는 손진책 연출가의 주문이었다. 오필리어의 목소리는 1200여 석의 해오름극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라 거울을 보며 연습하고 상상하다 검색까지 했어요. 제가 설정한 값이 생기니, 소리가 나오더라고요. 지금은 온몸으로 하고 있어요. (웃음)” (박지연)

420여 년의 시간을 넘나든 스테디셀러가 다시 무대로 왔다. 지난달 개막한 연극 ‘햄릿’(8월 13일까지·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다. 젊은 배우들을 향한 손진책 연출가의 디렉션은 치밀하고 꼼꼼하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도 놓치지 않는다. 레어티즈 역할을 맡은 박건형은 모든 배우들이 모인 연습 첫날을 떠올렸다.

“제 첫 대사는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예요. 연출님께서 대사를 듣더니 ‘좀 더 발성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머리도 복잡해졌다. “내 목소리가 작은가? 다시 해봤더니, ‘그건 품위가 없어 보인다’고 하시더라고요. ‘품위’라는 단어는 알지만 그 단어를 얼마나 잊고 살았던가, 이 단어를 그동안 어떤 연출가에게서 들어봤던가 싶더라고요. ‘품위’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 시간이었어요.” 2001년 뮤지컬 ‘더 플레이’로 데뷔, 어느덧 22년차. “품위 있으면서도, 신뢰를 주고, 자신감이 담긴” 한 마디,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를 온전히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배우로의 “굳은살을 도려내고 새 살을 만나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햄릿’에서 레어티즈를 연기하는 박건형(오른쪽)과 오필리어를 연기하는 박지연. 임세준 기자

박건형(44)·박지연(34)은 연극 ‘햄릿’의 막내 라인이다. 2016년 이해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무대에 올랐던 ‘햄릿’은 연출을 맡은 손진책을 비롯해 권성덕(81)· 전무송(81)·박정자(80)·손숙(78)·정동환(73)·김성녀(72)·유인촌(71)·윤석화(66)·손봉숙(66) 등 이른바 ‘선생님 배우’들이 모두 함께 한다. 이들은 주연 자리는 후배들에게 내주고, 조연·단역으로 호흡한다. 최근 서울 중구 해오름극장에서 만난 박건형 박지연은 “‘햄릿’은 배우로의 시간을 돌아보고 확인하는 작품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가시밭길’이라고 했다. 최소 10~20여년, 저마다 각자의 길을 닦아온 ‘젊은 배우’들이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연기 경력 최고 60년을 넘어선 선생님 배우들과의 무대에 도전했다는 의미에서다.

“왜 가시밭길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으면서도 여기가 가시밭길인지 꽃길인지 가르쳐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어요. (웃음) 사실 이 길이 고난이라고 느낀다면 아마 하지 못할 거예요. 용기를 내 한 발 한 발 들어가야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있어요.” (박건형)

작품과의 만남은 ‘온전한 끌림’이 이유가 됐다. 박지연은 “뭔가에 홀린 듯이 ‘햄릿’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역할을 다른 사람이 하는 게 싫었어요. (웃음) 너무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했는데, 겪어보고 지나오니 지금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박지연)

배우 박건형과 박지연 오필리어와 레어티즈는 연기하기에 힘든 인물들이다. 오필리어는 1막과 2막에서 극적인 변화를 보여줘야 하고, 레어티즈는 가족들의 죽음을 온몸으로 마주해야 한다. 임세준 기자

두 사람이 연기하는 오필리어와 레어티즈는 여느 배우들에게도 힘든 인물이다. 오필리어는 1막과 2막에서 극적인 변화를 보여줘야 하고, 레어티즈는 가족들의 죽음을 온몸으로 마주해야 한다.

박지연은 “1, 2막에서의 오필리어의 낙차를 굉장히 크게 그린 작품”이라고 했다. “연출님께서 흔들리고 감정에 치우치는 오필리어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는 오필리어를 주문하셨어요. 그 부분을 따라가려 노력했어요. 그러면서도 원작이 가진 한계가 존재하잖아요. 1막에서의 온전한 오필리어와 2막에서의 미쳐버린 오필리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제겐 가장 중요했어요.” (박지연)

레어티즈는 1막 등장 이후 다시 무대로 오르기까지 “1시간 50분”의 공백이 생긴다. “그동안 (레어티즈는) 공연장을 몇 바퀴 뛰고 온다는 소문이 있어요. (웃음)” (박지연)

박건형은 “대본상으로 레어티즈는 7페이지에 유학을 가서, 51페이지에 돌아온다”고 말했다. “그 때 모든 죽음을 마주하는 거죠.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복수를 결심하고, 미쳐버린 동생을 보죠. 바로 옆에서 당하는 일인데 저로선 경험한 적 없는 고통이다 보니, 스스로 고통스러운 걸 계속 생각해요. 그 시간 내내 아버지(폴로니어스)의 죽음도 생각하고요. 계속 생각하다 찰나의 순간에 제가 표현할 감정을 만나면 그게 무대에서 나오는 거예요.” (박건형)

대본과 인물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고, ‘인간문화재’ 선배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것 자체로 배움과 성장이다. 두 사람도 가만히 곱씹어야 진가를 마주하는 작품 ‘햄릿’을 닮아간다. 이들의 얼굴에 쌓이는 한 줄 한 줄의 감정과 깊이는 배우로의 고뇌가 가져온 결과다.

배우 박건형. 임세준 기자

박건형은 이번 작품을 통해 배우로 쌓아온 많은 것을 뒤흔드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선생님들과 함께 하며 받은 크나큰 느낌은 ‘내 자신이 되게 얕다’는 점이었다”고 고백했다.

“저도 20년 넘게 했으니 나름 해왔다 생각했는데, 선생님들 앞에 서니 대사를 못하겠더라고요. 첫 대사부터 가볍게 툭툭 던지는 데도 후벼 파는데, 거기에 대고 제 미천한 목소리를 낼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해온 것이 정답이라 생각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뒤틀리는 느낌이었어요.” (박건형)

첫 연습 날이었던 5월 23일 이후 배우들은 매일 출근하며 호흡을 맞췄다.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이들 모두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박건형은 “배우로서 정형화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고착화된 것들을 벗겨내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굳은살을 연하게 만드는 과정은 힘들잖아요. 놔두려면 놔둘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긴 싫은 마음이었어요.” (박건형)

배우 박지연. 임세준 기자

박지연도 “‘햄릿’을 하며 새로운 자극을 끊임없이 만나, 한 인간으로서도 배우로서도 성장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배우는 늘 배역 속에 있다 보니, 개인의 삶에선 행복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어요. 모질게 받는 대사가 깊숙이 들어와 상처가 될 때도 있고요. 내가 선택했기에 온전히 감내해야 하는 거죠. 그러다 어느 순간 나를 잃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던 시점에 이 작품을 만났어요. 선생님들을 보면서,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나의 길을 쭉 걸어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박지연)

두 사람은 매회 공연 후 커튼콜 무대에선 남다른 감동을 마주한다. 박건형은 “공연 속의 공연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나와 인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면 우리도 그 순간 관객이 된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어요. 그 박수가 다음 공연을 위해 건강하고, 건재하시라는 의미라고 생각됐어요. 그 박수가 계속 이어지고, 이런 축제가 꾸준히 열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박건형, 박지연)

‘햄릿’은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175분 안엔 허망한 죽음들이 이어지고, 그 죽음을 마주하는 산 자들이 나온다. 박지연은 “‘햄릿’엔 다양한 죽음을 마주하는 다양한 방식이 나온다”며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추악한 삶이라고 하잖아요. ‘햄릿’엔 그런 이야기가 담겨있어요.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 되리라 생각해요.” (박건형)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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