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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독관사·경무대…청와대, 역사속으로[정치 플러스]
5월 10일 0시 국민의 품으로
尹당선인 용산시대 열며 ‘새 장’
조선시대엔 경복궁 후원 중 하나
윤보선때 경무대를 청와대 개명
YS때부터 이전 시도 ‘경호 벽’에
시민에 개방 명소로 재탄생 준비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28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회동을 가졌다. [연합]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월 1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외국인투자기업인과의 대화에 참석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
2007년 9월 29일 청와대 정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은 양을 무등 태우고 있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후 故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가 제공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부인 김윤옥 여사가 1993년 3월 신임 김영삼 대통령의 청와대 입주를 환영하는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1977년 2월 26일 청와대 본관 앞,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의 모습 [국가기록원]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5년 경무대(현 청와대)에 어린이들을 초청해 훈시를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청와대가 20여일 후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겨가면서 물리적 공간 뿐 아니라 ‘쳥와대(靑瓦臺)’라는 명칭도 없어진다. 지금의 청와대는 공원 또는 기념관 등의 모습으로 시민에게 완전히 개방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취임일인 내달 10일 0시부터 청와대를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해방 후 역사 품은 곳…총독부 관사에서 경무대로, 그리고 청와대로=청와대의 터는 조선시대 경복궁의 후원(後苑) 중의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이곳에 건물을 짓고 총독관사로 이용했다.

해방이후 미군정 때는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중장이 관저로 사용했다. 1948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이화장에서 이곳으로 집무실을 옮기며, 이름을 경무대(景武臺)로 불렀다. 이승만 정권이 4. 19혁명으로 무너지면서 경무대는 원성의 대상이 되자 윤보선 전 대통령이 청와대로 이름을 바꿨다.

이때 경무대를 대체할 이름으로 화령대도 함께 검토됐다고 한다. ‘화령’은 조선 태조가 조선이라는 이름을 짓기 전에 함께 고민하던 이름 중 하나다. 윤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청와대로 부른 이후, 명칭은 지금까지 이어지며 권력의 상징이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때는 청와대 대신 황제의 상징인 ‘황’을 넣어 황와대(黃瓦臺)로 부르자는 안도 검토됐으나 폐기됐다. 이후 개건축 등을 거쳐 청와대는 현재의 본관, 대통령 비서동인 여민1~3관, 녹지원, 상춘재, 경호동, 본관, 사저, 영빈관 등으로 자리잡았다.

▶국가기록원 “길지”…대통령 대부분 불행한 말년=국가기록원에서 청와대를 설명하는 글을 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청와대가 예로부터 풍수지리상으로 명당에 속했다는 것’이다. ‘북으로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 낙산(駱山), 우백호 인왕산(仁王山),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명당수인 청계천이 동쪽으로 흐르고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매우 길한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라고 국가기록원은 설명한다.

국가기록원의 기술과는 달리, 청와대 주인들은 대부분 불행한 말년을 맞았다. 쫓겨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난 뒤 죽는날까지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 여사는 암살됐고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모두 수감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40%의 지지율을 유지하며 임기를 마무리 하고 있지만 여권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특히 이번 대선은 1987년 민주화 후 처음으로 ‘10년 주기 정권교체론’이 깨진 선거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부터 청와대 이전 시도=청와대를 옮기려는 시도는 역대 정부부터 이어져 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집무 공약을 내걸었지만 이행되지 못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8년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와 과천 제2정부청사에 집무실을 마련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이때도 경호 비용 등의 문제로 중단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은 2004년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실현되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광화문 시대’를 선언하며 청와대 이전 공약을 내걸었으나 경호와 예산 등의 문제로 결국 무산됐다.

유홍준 전 광화문 대통령 시대 위원회 자문위원은 2019년 1월 브리핑에서 광화문 이전 계획의 보류를 발표하며 “현 관저가 가진 사용상의 불편한 점, 나아가 풍수상의 불길한 점 등을 생각하면 (관저를) 옮겨야 한다”고 말하며 풍수를 언급해 화제가 됐다.

▶구중궁궐, 불통의 상징 청와대…역대 정부 모두 개방 노력= ‘구중궁궐’은 청와대 비판에 가장 많이 등장한 말 중 하나다. 정책이 효과를 보지 못하거나 발생한 일련의 상황에 적시에 대응하지 못할 경우, 대통령이 구중궁궐에 묻혀 소통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다.

구중궁궐에는 시민들의 접근이 어려운 청와대의 폐쇄적인 성격도 담겨있다. 청와대는 광화문 광장에서 차로 10분 거리 정도 밖에 안되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청와대 앞길과 삼청동 길 등 청와대로 접근하는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청와대 앞길을 걷다 봄꽃에 취해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청와대 앞을 지키고 있는 무장 경찰의 눈이 번뜩이고 사복경찰관이 다가와 행선지를 묻기 일쑤다.

청와대 개방은 역대 정권이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메시지 중 하나였다. 문 대통령은 취임 한달 만에 청와대 앞길을 24시간 개방했고 대통령 별장인 저도도 시민 품으로 돌려줬다. 특히 국무회의가 윤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집무실 이전계획 의결한 지난 5일에는 청와대로 이어지는 마지막 남은 북악산 남측면을 개방해, 신구권력간의 청와대 개방경쟁이 붙은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청와대의 개방은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자주 활용한 메시지였다. 열린 청와대에서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 첫 날 김신조 사건이후 27년간 통제됐던 청와대 앞길을 일부 개방했고, 인왕산 역시 개방했다. 김영삼 정부 때는 궁정동 안가 등 청와대 소유 안가 12채가 철거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주재하던 국무회의를 처음으로 서울청사에서 주재했다. 청와대 경내에 있는 칠궁도 이때 개방됐다. 노 전 대통령은 경복궁 4대문 중 유일하게 비공개로 남아 있던 신무문을 개방했으며, 창의문에서 와룡공원에 이르는 북악산 성곽로 구간도 개방했다. 박병국 기자

c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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