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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 대통령의 서사, 서사로서의 대통령

대선이 끝난 직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인생역정을 소개하는 데에 동원된 언론의 표현은 대동소이했다. ‘강골검사’ ‘살아 있는 권력수사’ ‘뚝심과 결단의 보스’ 등의 문구였다. 헤럴드경제는 ‘타협 모르는 검사’ ‘공정 이미지’ ‘거침없는 보스 기질’ ‘뚝심의 칼잡이’ 등으로 윤 당선자의 걸어온 길을 소개했다. 윤 당선인이 가진 ‘승리의 서사’는 역대 대통령들과는 달랐다. 시골에서 가난했던 성장기도 없었다. 해방·전쟁·민주화 등 역사 격변기 속 청년시절의 뒷얘기도 없었다. 시련과 좌절의 정치 경력도 없었다. 대권에 오르기까지 윤 당선인의 서사는 오로지 하나에만 맞춰 있었다. 검사 혹은 ‘칼잡이’. 우리 국민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대선 승리의 서사를 갖게 된 것이다.

대통령은 어떤 의미에선 ‘서사’다. 과거를 돌이켜보자. 박정희·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은 ‘군인’ 혹은 ‘장군’의 서사로 최고 권좌에 올랐다. 집권 이후 써 내려간 이야기는 같고도 달랐다. 박 전 대통령이 일궈낸 눈부신 개발신화는 어떤 이들에겐 쿠데타의 서사를 단지 영광 뒤 그림자로만 보이도록 했다. 반면 전 전 대통령은 마지막까지 군인 출신 독재자의 서사에 충실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핍박받는 자’로서 승리했고, 집권 후엔 ‘민주주의의 구원자’로서 ‘국민통합’의 서사를 써 내려갔다. 대선 과정에서 모든 후보가 입을 모아 말한 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사는 당선부터 집권, 퇴임, 서거까지 ‘바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축약할 만한 것이었다. ‘독재자의 딸’(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커버스토리 제목), 첫 여성 대통령, 선거의 여왕 등 많은 ‘서브플롯’을 가졌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중심 서사는 ‘공주’ 혹은 ‘영애’에 있었다.

지금까지 문재인 대통령에게 가장 강력한 서사는 ‘노무현의 친구(로서의 운명)’라는 서사다. 집권 후에 써 내려갔던 ‘중재자’(타임의 표현대로라면 협상가·negotiator) 혹은 ‘운전자’로서의 서사가 퇴임 후에도 그대로 역사와 국민에게 받아들여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대통령은 승리자이자 집권자로서 서사를 갖는 동시에 국민에게 서사 그 자체로 존재하기도 한다. 모든 국민에게 ‘가능성의 서사’로 받아들여진다는 말이다. 국민 개인으로서 대통령은 학력, 직업, 출신, 인종, 종교, 성별, 계급, 사상, 도덕성 등 신분과 정체성의 모든 측면에서 달성 가능한(혹은 허용 가능한) 최고(혹은 최저)와 최선(혹은 최악), 상한선(혹은 하한선)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국민에게, 특히 자라나는 후세대에게 대통령은 ‘이런 사람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런 사람이(도) 성공한다’는 극적인 예시로 존재한다. 우리에겐 첫 호남, 첫 고졸, 첫 여성 대통령 등이, 미국에선 첫 장애인, 첫 흑인(아프리카계 미국인), 첫 배우 출신, 첫 리얼리티쇼 방송인 출신 대통령 등의 사실이 중요했던 이유다. 대통령은 존재 자체가 국민에게 희망 혹은 절망인 ‘가능성의 서사’가 될 수 있다.

윤 당선인은 ‘(사법적) 정의의 칼잡이’로서 승리 서사를 완성했다. 집권 이후 대통령과 최고지도자로서는 윤 당선인이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까. 국민과 역사엔 어떤 ‘가능성의 서사’를 제시할까.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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