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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K-9 자주포 사고' 이찬호 "주연 못한다는 거 알아요…그래도 올핸 꼭 연기하고파"
K-9 자주포 폭발 사고 생존자 이찬호(28) 씨의 사고 전(왼쪽) 모습과 사고 후 모습. 그는 2019년 포토에세이 '괜찮아, 돌아갈수 없어도'를 내고 "화상 흉터를 숨기고 살 이유를 모르겠더라"고 했다. [이찬호 씨 제공]

[헤럴드경제=박로명 기자] 1초 만에 죽음을 직감했다. 2017년 8월 18일 오후 3시 19분, 전차 안으로 들어온 불꽃이 그대로 화약에 옮겨붙었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K-9 자주포 철갑이 찢겨나갔다.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은 “핵폭발을 연상시키는 큰 불기둥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고 했다. 적군 없는 전쟁터였다.

지난달 26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헤럴드스퀘어에서 만난 군부대 자주포 폭발사고 생존자 이찬호(28·사고 당시 22)씨는 불꽃을 목격한 찰나, ‘이젠 죽는구나, 아직 죽긴 어린데’라는 생각이 스쳤다고 했다.

2시간 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잊혀진 '그날'과 '그후 5년'에 대해 비교적 담담하게 말했다. 대신, 입대 전부터 몰두했던 연기자를 향한 꿈을 얘기할 땐 눈빛이 빛났다. 새해 인사도 잊지 않았다. "좀 힘들어도 버텼으면 좋겠다. 정말 짧은 것만 보면 죽고 싶다는 생각 많이들 하시는데, 버티면서 멀리 보고 여유를 가지면 좋겠다."

K-9 자주포 폭발사고로 온몸 55% 화상을 입은 이찬호 씨. 그는 K-9 자주포 생존자 보다 '연기자' 이찬호로 불리고 싶다고 했다.[박해묵 기자]

사고 직후, 그가 눈을 떴을 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일순간 섬광이 번뜩였고, 밀폐된 장갑차는 희뿌연 연기로 가득 찼다. 화마가 휩쓸고 간 살갗은 껍질처럼 벗겨졌다. 전투복도 녹아 피부에 눌어붙었다. 오직 촉감에 의지해 시뻘건 손으로 뜨거운 쇳덩이를 더듬으며 기어 나왔다.

강원도 철원 5포병여단에서 일어난 K-9 자주포 폭발 사고는 제대 8개월을 남겨뒀던 병장 이찬호 씨의 삶을 불길 속으로 집어삼켰다.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온몸의 55%에 화상을 입었다. 83㎏였던 몸무게는 치료과정에서 66㎏가 됐다. 그날 함께 포격 훈련에 나섰던 장병 7명 중 3명이 숨졌다.

K-9 자주포 폭발 사고 직후 화상 치료 중인 이찬호(28) 씨의 모습 [이찬호 씨 제공]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라처럼 붕대를 감고 살았다. 피부를 소독할 때면 연한 살이 붕대에 붙어 찢겨나갔다. 그 고통은 수백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의사는 “어디부터 수술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생존 확률이 50%보다 낮다”고 했다. 피부의 절반이 불타 자가피부이식 수술을 하기도 어려웠다. 10번의 수술을 반복하며 죽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곁을 지키면서도 단 한 번도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뭐 사다 줄까” 물어보며 매일 음식을 사왔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을 견디게 해주었던 건 여장부 같던 어머니와 원초적인 식욕이었다.

이찬호씨는 2018년 5월 국가유공자 지정을 위해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청원글을 올렸다. 게시 1달이 채 안돼 동의 30만명을 넘겼다. [박해묵 기자]

2년이 지난 2019년 말, 그는 퇴원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여러 번 피부이식 수술을 받아야 한다. 그는 “화상은 완치가 없다”고 했다. 피부를 이식해도 흉터가 남고, 피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피부 감각이 없고, 체온 조절과 땀 배출이 어렵다. 그렇기에 일상 복귀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여기에 ‘화상인’이라는 낙인은 흉터만큼이나 깊었다.

국가유공자 지정도 순탄치 않았다. 그는 2018년 5월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당시만 해도 전역을 해야 국가유공자 심사 신청을 할 수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전역을 하는 순간 병원비를 지원받지 못하는 구조였다. 청원글을 올린 지 4개월 후 그는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 이찬호 씨는 "청원글에 많은 분이 응원해줘 이례적으로 빨리 지정된 것"이라며 "군 사고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현재는 이들을 위한 지원 체계가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 했다.

K-9 자주포 폭발 사고 생존자 이찬호(28) 씨는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다(왼쪽). 오른쪽 사진은 입대 전 운동하던 모습.[이찬호 씨 제공]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한 건 운동을 하면서였다. 거울에 비친 몰골은 흉터만 가득한 해골 같았다. 영화 ‘매드맥스’의 괴물이 떠올라 거울을 보기 싫었다. 그래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약한 피부가 운동기구의 중량을 견디지 못했다. 피부가 쓰라렸지만 스키 장갑과 온갖 보호대를 착용했다. 살과 근육이 붙자 흉터가 다르게 보였다. 근육은 누구나 가질 수 있었지만, 흉터는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K-9 자주포 폭발 사고 전 연기자를 꿈꾼 이찬호 씨의 모습 [이찬호 씨 제공]

그는 중학교 때부터 배우를 꿈꿨다. 예고에 진학했고 제대 후 본격적으로 연기에 도전할 생각이었지만, 사고 후유증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는 “현실이 저를 끊임없이 밀었다”고 했다.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직장도 없었고, 그렇다고 일을 구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친구들이 취직해 효도할 시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싫기만 했다.

그랬던 그가 옛 꿈을 떠올리게 된 건 한민수 패럴림픽 아이스하키 선수 때문이었다. 하지 절단 장애를 가진 한 선수는 2018년 평창 동계패럴림픽을 끝으로 은퇴해 장애 전문 종합엔터테인먼트를 운영하고 있다. 한 선수가 그에게 먼저 연락해 "장애인들에게도 끼와 멋이 있다"며 소속사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고, 지난해부터 한솥밥을 먹게 됐다.

"올해는 꼭 연기를 해야겠더라고요."

그도 현실을 안다.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는 "소방관, 군인, 경찰 등 사연이 있는 배역이 들어온다면 열심히 해보고 싶다"고 했다. "제겐 분장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생생한 흉터가 있다"면서. 그러면서 그는 "이제 K-9 자주포 폭발 사고 생존자가 아닌 연기자 이찬호로서 이름을 알리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불꽃’이라고 표현했다. 심각한 화상을 입었지만, 역경을 정면 돌파할 힘을 쥐고 있다. 사람들이 “폭발 사고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은 로또 맞을 확률보다 희박하다”고 했다. 그런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면, 정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언젠가 행운이 오지 않을까.

“죽음의 문턱에서 인생 2회차 기회를 얻은 것 같아요. 저는 뜨겁지 않은, 따뜻한 불꽃이 되고 싶어요. 제 안에 있던 심지가 활활 타오르게 하고 싶어요.”

dodo@heraldcorp.com
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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