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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남친에 시달려 잠도 못 자요”…‘무서운 기억’ 지울 수 있을까
[123rf]

[헤럴드경제=정태일 기자]#1. A씨는 어렵게 헤어진 전 남친 때문에 일상을 잃었다. 관계는 끊었지만 ‘데이트 폭력’에 시달린 탓에 후유증이 여전히 크다. 전 남친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만 봐도 숨이 턱 막힌다. 잠에 들려고 해도 무서운 기억 때문에 날을 꼬박 새는 하루가 반복되고 있다.

#2. B씨는 바다를 보기만 해도 덜컥 겁부터 난다. 어린 시절 해수욕장에서 놀다 큰 파도에 휩쓸려 아주 위험한 순간을 겪은 탓이다. 다른 사람들은 여름철 바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B씨에게 바다는 ‘공포’ 그 자체다.

공포(恐怖). 두렵고 무서운 감정이다. 누구나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있다. 공포는 특정 기억이 남아 있어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학습’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이 ‘기억’을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아 고통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러 가운데 뇌에서 기억을 저장하고, 기억의 상태를 반영하는 핵심 ‘실체’가 증명돼 과학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공포 유발 기억을 없앨 수 있는 ‘원리’가 규명돼 향후 정신적 심리 치료에 획기적인 기폭제가 될지도 주목된다.

[123rf]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서울대학교 강봉균 교수 연구팀이 뇌에서 기억이 사라지는 원리를 신경세포 간의 연결점인 ‘시냅스’ 수준에서 밝혀냈다고 7일 밝혔다.

시냅스는 신경세포와 신경세포가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연결 부위를 뜻하는 것으로 이번 연구 결과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연구팀은 공포를 학습하고 공포 기억을 없애는 과정에서 시냅스의 크기가 변화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가령 실험쥐에게 특정 소리를 일정 시간 동안 들려준 후 소리 종료 마지막 수 초 간 약한 전기충격을 함께 가한다. 이를 통해 특정 소리에 대한 공포 기억이 형성된다. 그러면 전기충격 없이 학습에 사용된 소리만 들려줘도 공포로 인해 쥐의 행동이 얼어붙는 반응이 나타난다.

반대로 청각 공포 기억이 형성된 쥐에게 전기충격 없이 학습에 사용한 소리를 반복적으로 들려주게 되면, 공포 기억이 사라져 소리로 인한 공포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연구팀은 공포 학습으로 기억 저장 시냅스의 크기가 증가했고, 공포 기억을 없앴을 경우 기억 저장 시냅스의 크기가 감소한 것을 밝혀냈다. 기억이 사라진 개체에 동일한 조건으로 공포를 학습시켰을 때, 작아졌던 기억 저장 시냅스의 크기가 다시 회복된 점도 규명했다.

공포학습에 의해 기억저장 시냅스(Synapitc engram, E-E)의 크기가 증가했고, 반대로 공포기억의 소멸로 크기가 감소했다. 동일한 공포기억을 학습시키면 작아졌던 기억저장 시냅스의 크기가 회복됐다. 이는 기억저장 시냅스가 기억의 상태를 반영함을 보여준다. [강봉균 교수 연구팀 제공]

즉, 역으로 뇌에서 시냅스를 약화시키면 특정 기억이 사라져 공포 등의 무서운 감정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시냅스가 뇌에서 기억을 저장하는 중요한 단위이자 기억의 상태를 반영하는 ‘물리적 실체’임을 명확하게 증명한 것이 이번 연구 최대 쾌거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 같은 정신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적절한 기억 소거로 공포 반응이 사라진다는 이번 연구 결과를 통해 심리 장애 치료 개선 길이 열렸다.

연구책임자인 강봉균 교수도 본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미 많은 병원에서 임상으로 기억을 없애는 치료를 진행 중이고, 이번 연구로 시냅스와의 상관관계가 밝혀져 혁신적인 치료법 개발이 가능해졌다”며 “기억저장 시냅스가 뇌에서 기억을 저장하는 중요한 단위라는 것을 확인해 기억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공포 기억 소거를 통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 등 질병 치료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강봉균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이번 연구의 성과는 신경 과학 분야 최상위 국제 학술지인 뉴런(Neuron)에 8월 7일 0시(한국시간) 발표됐다.

앞서 연구팀은 뇌의 ‘해마’에서 ‘기억저장 시냅스’를 발견함으로써 기억이 신경세포의 시냅스에 저장될 것이라는 도널드 헵의 가설을 세계 최초로 실험으로 증명한 바 있다.

killpas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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