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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갱이 vs. 토착왜구,’ 그리고 美점령군 [한반도 갬빗]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1964년 설립된 이래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하지만 대선시즌 때마다 철 지난 ‘이념전쟁’이 한국을 지배한다.

발단은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단계와는 좀 달리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사실 그 지배체제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느냐”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발언이었다. 여기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왜곡된 역사관”이라 비난하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점령 없는 해방 없다

기본적으로 ‘점령’이 없었으면 ‘해방’도 없었다. 미군을 ‘점령군’이라고 한 이 지사의 발언은 틀리지 않았다.

1945년 7월 포츠담회담 당시 사진

다만 조선반도를 미군이 ‘점령’하지 않았으면,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국가였던 조선은 ‘조선이 아닌 일본’으로 분류됐을 것이다. 이른바 ‘점령군’을 통해 해방을 얻은 또다른 국가로는 대표적으로 오스트리아가 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국의 일부로서 나치독일과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1943년 연합국들이 모스크바 선언을 통해 오스트리아가 독일로부터 침략을 당한 첫 희생국가로 인정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같은 방식으로 4개 점령지역으로 나뉘어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게 분할점령됐다. 군정기를 거쳐 오스트리아 정부는 영세중립을 선언해 1955년 5월 15일 공식 ‘해방’됐다. 점령군은 점진적으로 병력을 철수했고, 그해 10월 25일 철수작업을 마쳤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역시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분할점령이 됐는데, 이때 남북을 가른 선이 한반도 분단의 초장을 연을 ‘38선’이었다.

38선 획정, 즉흥적이지 않았다

일본이 식민지배했던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된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한 첫 문서는 1945년 8월 22일 더글라스 맥아더 연합국최고사령관이 발표한 일반명령 제1호(General Order No.1)다. 전문에 따르면 한반도 38선 이북에서의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군이 접수하며 이남에서는 미군이 접수한다고 돼있다.

이 ‘38선’ 기준을 두고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그동안 미국 전쟁부 작전국 산하의 전략정책단에서 정책과장보를 맡았던 딘 러스크 대령의 회고록을 통해 미국이 ‘즉흥적’으로 선을 그었다는 설이 팽배했다. 러스크 대령은 자신의 회고록 ‘나는 보았다’에서 동료 찰스 본스틸 대령과 함께 벽에 걸려있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를 보고 1945년 8월 11일 새벽 2시부터 3시 사이에 즉흥적으로 38선을 그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과 얄타회담, 포츠담 회담과 미 국무부와 소련 외교부 문서를 종합해보면 38선 획정을 포함한 한반도의 분할점령에 대한 검토는 미국뿐 아니라 소련까지 모두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944년 3월~4월 미 국무부 극동국에서 작성한 비망록에는 “국무부 관리들과 타부서 관련 요원들은 전후 한반도의 지위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4v05/d1201)

38선 이남 내부 정치동향을 담은 소련의 외교문서. [우드로윌슨센터]

이 때 동북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미묘한 ‘신경전’이 두드러졌다. 루즈벨트 대통령에 이어 집권을 하게 된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소련의 한반도 공산화를 우려했다. 소련은 38선 이북 공산화에만 관심이 있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조지프 스탈린 소련 수상과 전후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제의한다. 1945년 7월 2일 중화민국의 쑹쯔원과의 협의에서 스탈린 수상은 “미국과 분할점령을 논의했으나, 군의 주둔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오히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해방’하는 데에 시각을 같이”하고 있는데, 영국이 주둔군 하의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있다고 했다. (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122505)

해방정국, 美점령군과 친일세력의 합작?…중도파 몰락 압박한 한민당, 민주당의 전신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미 점령군과 친일세력의 합작이었나. 미 점령군이 친일청산에 소극적이었다. 38선 이남을 ‘새단장’하는 과정에서의 혼란을 감당하는 것보다는 ‘현상유지’하며 공산화를 막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미 군정은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행정직원들을 그대로 재고용해 ‘친일청산의 기회를 놓쳤다’는 비난을 받는다. 문제는 이때 친일청산 여론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국내 좌우 논쟁에 밀려 설 자리를 잃었다는 점이다. 친일청산은 해방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과제로 남아있다.

미 군정 당시 좌우합작을 공격하는 극좌와 극우를 풍자한 만화

미 점령군은 ‘반공주의’ 내세우는 과정에서 국내 우익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대표적인 인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다. 그러나 미 군정이 우익세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지지했던 건 아니다.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 이후 미 군정은 온건파로 분류되는 김규식과 여운형을 만나 좌우합작을 권고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극좌와 극우 모두에게 공격을 받았다. 당시 미 군정은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이승만과 김구에게 여운형에 대한 테러행위를 중지하라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 근로인민당 위원장 김규식,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 통역으로 활동한 이묘목, 소련 측 통역, 소련측 대표 테렌티 스티코프, 허헌 남조선노동당 위원장. [미디어한국학]

1945년 소련 외교부에서 작성한 ‘한국의 공산화 움직임’ 보고서를 보면 당시 첨예했던 남한의 정쟁구도를 엿볼 수 있다. 소련은 “공산당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정당 중 하나”라며 “다음으로 강한 정당은 자본가들과 지주들을 대변하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인데, 반(反)공산주의 성격이 강한 반면 제국주의에 찬성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참고로 소련은 이 문서에서 북한의 공산화 전략을 구체적으로 풀어썼다.

( 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114890)

한민당은 미군정에 협력적인 자세를 취한 정치세력으로, 국내 독립운동가들인 김병로, 김준연, 백남훈, 송진우, 원세훈, 조병옥과 호남지역 기반의 지주·자본가로 꼽히는 김성수, 윤치영, 장덕수 등이 연대해 창당됐다. 이재명 경기도 지사가 ‘친일세력’이라고 지칭한 이 정당은 공교롭게도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으로 꼽힌다. 한민당은 친일청산 운동을 위한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무산시키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한민당은 향후 민주국민당을 거쳐 민주당으로 확대·개편했다. 민주당의 핵심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조순형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한민당 창당을 주도했던 조병옥 박사의 아들이며, 정대철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도 한민당 창당멤버인 정일형 박사의 아들이다. 한민당은 당초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했으나,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반발해 제1야당으로 거듭났다.

임시정부의 굴욕과 냉혹한 국제사회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오늘날 미얀마 군사정부에 맞선 임시정부 격인 ‘국민통합정부’와 신세가 비슷했다. 미국도, 소련도, 중국도 임시정부를 한반도의 공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경우, 세계 각국의 망명정권을 상대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놓일 수 있었던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대신 해방 조선에서 일단 신탁통치를 하기로 했다. 임시정부가 기반을 뒀던 중국(당시 중화민국)도 ‘미국과 협의해야 한다’며 임시정부를 외면했다.

일본군 무장해제에서부터 한반도 공동점령에서 분할점령 논의, 그리고 38선 획정 과정까지 모든 결정은 ‘미·소·중 등 한반도를 둘러싼 연합국의 세력지형’을 고려해 이뤄졌다. 한반도가 설 자리는 없었다. 38선 획정 이후 남한 내 정치집권을 두고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과 김성수 주도의 한민당은 격렬한 갈등하게 갈등했다. 중도파는 좌우의 협공에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빨갱이 vs. 토착왜구’와 한반도 분열의 책임

빨갱이와 토착왜구. 두 표현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 간 미묘한 기싸움이 시작되면서 탄생했다. 소련이 북한의 공산화에 공들이는 사이, 미 군정은 친일논란과 좌우분열 등 국내 복잡한 변수들 사이에서 우익세력에 힘을 실었다.

1948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파견된 대한민국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조병옥 특사단장, 장면 대표단장, 장기영 차석대표. 유엔은 대한민국을 5 · 10선거가 치러진 지역에 관할권을 갖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근간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불변하는 사실은 ‘한반도는 대외정세에 무기력했다’는 점이다. 요동치는 국제정세 속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광복군도, 건국준비위원회도 한반도 통합에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38선 이남 단독선거 및 단독 정부 수립을 두고 한계를 지적하는 건 마땅하다. 분명 미국과 소련, 특히 미국은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태평양전은 결과적으로 ‘조선의 해방’을 이끌었다. 일본의 이른 항복으로 실패로 돌아간 광복군의 한반도 침공작전인 ‘독수리 작전’도 미국 전략첩보국(OSS)과의 연합으로 추진됐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미 점령군과 친일세력의 ‘합작’이라는 주장은 국내 정치세력의 책임을 희석시킨다.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과거에 대한 비판을 “왜곡된 역사관”이라 매도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미 군정 당시 국내에는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 속지말라, 일본 일어난다, 조선 조심해라”라는 말이 널리 퍼져있었다. 오늘날 친미와 반미, 빨갱이와 토착왜구로 이분된 정쟁구도를 생각하면 참으로 모순적이지 않을 수 없다.

70년이 지나고도 대중과 괴리된 엘리트들의 정치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해묵은 색깔논쟁이 한반도의 비극을 해결해주진 않는다. 이제는 ‘국제정세를 주도하는 대한민국’으로 거듭나는 방법을 고민하는 대선경쟁을 보고 싶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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