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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칼럼] 연평초령의모도 진위논쟁

1748년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일본에 간 최북(毫生館 崔北, 1720~?)이 ‘연평초령의모도(延平 齡依母圖)’ 밑그림을 그린다. 1790년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는 이 밑그림을 가지고 북경에 가 나빙(羅聘, 1733~1799)과 함께 ‘연평초령의모도’를 완성한다. 1820년 이전에 완원(芸臺 玩元, 1764~1849)의 셋째아들 사경 완복(賜卿 阮福, 1801~1875)이 북경에서 이를 손에 넣어 외삼촌 초순(理堂 焦循, 1763~1820)에게 보여주고 찬을 받는다. 1863년 심수용(均初 沈樹 ,, 1833~1873)이 구입해 소장한다. 1933년 화상 에토(江濤)가 상해에서 구입해 동경으로 가져간다. 1934년 후지쓰카 지카시(藤塚 )가 소장한다. 유엔대사를 지낸 한옥표 유엔한국협회 고문이 외교관 재직 당시 ‘연평초령의모도’를 1998년 8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오늘에 이른다.

그림 맨 위에 초순이 제기를 쓰고, 왼쪽 위에 박제가도 제기를 썼다. 오른쪽 아래에 심수용(1832~1873) 인장을 찍었다. 연평(延平)은 명나라 황제가 정성공(鄭成功, 1624~1662)에게 내린 봉호, 초령( 齡)은 젖니갈이를 하는 나이, 의모(依母)는 어머니에게 의지해서 산다는 뜻.

2013년 10월 21일 정민 교수는 이 그림을 직접 보고 세부를 촬영한 뒤 세 가지 의문을 제기하며 위작 변증을 한다.

첫째, 연대가 맞지 않는다. 그림 위쪽에 초순이 찬한 제기에서 이르기를 “이 족자는 사경 조카가 호부의 관직에 복무하고 있을 때 북경 집에서 얻은 것”이라고 했다. 초순은 사경 완복이 19세인 1820년 세상을 떴다. 19세에 모든 것을 통과하고 호부 관리가 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글씨가 가짜다. 초정이 찬한 그림 왼쪽 위 제기 글씨도 박제가의 글씨와 다르다. 그림 속 박제가의 글씨는 학자풍의 글씨도 아니지만 모두 졸렬하고 삐뚤빼뚤하다. 셋째, 인장도 모조품이다. 그림 하단에 있는 인장 ‘沈樹 同治紀元後所得’에 등장하는 심수용은 청말 강남4대가로 불린 수장가 중 하나이고 인장을 각한 사람은 조지겸으로 청말 전각의 대가다. ‘조지겸인보(趙之謙印譜)’에 동일한 인장이 있다. 양자를 비교해보면 ‘연평초령의모도’의 인장은 원본과 현격한 수준차가 있다.

정민은 18세기 한·중 지식인에 대한 전문연구자다. 박제가 문집 ‘정유각집(貞 閣集)’ 공역자 중 하나다. 이제 더는 ‘연평초령의모도’를 진작이라고 주장하기 힘들어졌다.

염색가 신상웅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적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일본 히라도, 데지마, 우리나라 부여, 중국 베이징, 시아먼, 취안저우 등을 두루 걷는다. 2019년 출간한 책에서 ‘연평초령의모도’는 진짜라고 주장하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완복은 호부 소관(小官)에 불과했다”고 말하고 싶다. 말단 심부름꾼이니 10대 후반 나이에 할 만한 일이다. 초정이 쓴 글씨는 문제가 많다. 그렇지만 박제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문제다.

반청복명을 주도한 정성공은 그 이름만으로도 위험천만하다. 그래서 박제가는 자신이 쓴 글씨인 듯 아닌 듯 가볍게 붓을 놀렸다. 역모에 휘말리게 될 때를 대비해서 빠져나갈 안전장치 하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인장은 가짜다. 이름난 수장가의 인장을 찍음으로써 그림 값을 올리려는 수작이다. 결국 위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림 한 점에도 역사는 살아 숨 쉰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교과서 조작은 오죽하겠는가. 우리가 살아 숨 쉬어야 할 차례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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