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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헬멧·마스크 벗어라” 갑질에 배달라이더 집단분노…“좀 달라질까?”
헤럴드경제DB

[헤럴드경제=최준선 기자] “최근 뉴스보도 많이 되고 분위기 좀 바뀐 것 같지 않아요?” “뉴스에 백날 나와봤자 안 변합니다. OO신도시 아직 그대로고요, 어느 아파트는 시동까지 끄라네요.”

배달업 종사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아파트 주민의 갑질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라 라이더들이 집단행동에까지 나섰지만,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는 한숨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동조합 배달서비스지부는 지난 2일 국가위원회에 “일부 고급 아파트, 빌딩 주민들이 배달원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있다”는 진정을 제기했다. 지부는 배달원들의 제보를 토대로 진정서에 아파트 76곳, 빌딩 7곳 관리사무소를 피진정인으로 적시했다. 아파트 76곳 중에선 서울 강남구(32곳)와 서초구(17곳) 소재 아파트가 과반을 차지했다. 앞서 배달 종사나 노조인 라이더유니온도 아파트 103곳 입주자 대표회의를 상대로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배달노동자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은 온라인 설문링크를 통해 배달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갑질 아파트 국가인권위 진정 신청서’를 접수하고 있다.

이같은 집단 대응은 배달라이더에 대한 아파트 주민의 갑질이 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 최근 쏟아진 결과다. 대표적인 갑질은 ‘단지 내 이륜차 운행 금지’다. 택배기사나 배달라이더의 이륜차 운행이 주민 안전에 위험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한 조치이지만, 주민 안전을 위해 라이더가 감수해야 할 고충은 배려되지 않고 있다. 일부 아파트는 관리사무소 측에서 정문 이후부터의 배달, 배송을 책임지지만, 대부분은 정문에서부터 직접 단지까지 도보로 이동하도록 요구해 최소 업무 지연을 일으키고 있다.

이밖에 배달, 배송 과정에서 엘리베이터를 오래 세워둔다는 이유로, 혹은 엘리베이터에 음식물 냄새가 밴다는 이유로 화물전용 승강기나 계단만 이용할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눈이나 비가 오는 날, 빗물과 흙탕물로 로비를 더럽힐 수 있다는 이유를 들며 지하주차장으로만 출입하도록 안내받은 경험도 공유됐다. 배달업 종사자들이 이용하는 한 커뮤니티의 회원은 “물에 좀 젖었다고 눈길보다 더 미끄러워지는 (지하주차장으로 배달하도록 안내받았다)”고 하소연했다.

보안, 심리적 불편감 등을 이유로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갑질을 당했다는 배달업 종사자들의 토로가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초고급 부자아파트 오토바이 내려서 걸어서 배달해라’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게재된 영상 갈무리. [유튜브]

배달라이더의 복장을 규제하는 아파트도 있다. 헬멧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 아이들이나 여성들에게 공포감, 불안감을 줄 수 있다는 논리다. 심지어 한 아파트는 방한용 안면마스크를 벗으라고 요구해 코로나19 방역기준을 무시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빚기도 했다. 품 안에 흉기를 숨겨놓았을 수도 있으니 패딩을 벗으라고 요구한 아파트도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과연 국가인권위 진정 이후 이같은 아파트 갑질은 줄어들 수 있을까. 라이더들은 반신반의하는 모습이다. 일단 위원회에 진정이 접수되면 담당 조사관이 배정돼 해당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데, 위원회 의결 후 당사자 통보까지 통상 3개월이 걸린다. 다만 끝내 인권침해나 차별행위가 인정되더라도 ‘시정 또는 개선하도록 권고’될 뿐 법적 구속력은 없다.

물론 위원회는 피진정인, 즉 갑질 아파트 주민위원회가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 사유를 공표할 수 있다. ‘갑질 아파트’로 유명해지면 주민 평판이 악화될 수 있기에,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기란 어려울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하지만, 이미 주요 갑질 아파트는 이른바 ‘천룡인 아파트 리스트’에 이름을 올라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공유되고 있다. 천룡인이란 일본 만화 ‘원피스’에 등장하는 주요 악당 중 하나로, 만화 속 세계관에서 창조주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으로 설정돼 있다. 모든 규범 위에 군림하며, 나머지 인간을 깔보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정문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걸어서 배달을 해야 한다는 등의 ‘갑질’이 일어나고 있는 아파트단지의 목록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공유되고 있다. 사진은 지도 애플리케이션 위에 해당 단지를 표시한 이미지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그렇다 보니 갑질 아파트에 대한 배달 거부만이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강성 반응도 있다. 최근 배달 대행업체 ‘생각대로’는 배달차량의 출입을 막은 성동구의 신축 아파트에서 접수된 배달 주문에 대해 수수료를 2000원 인상한 바 있다. 배달라이더 배정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은 결과로, 이처럼 주민 부담이 높아지면 스스로 변화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합의에 도달한 사례도 있다. 서울 강남 도곡동의 한 주상복합아파트는 앞서 배달기사를 향한 갑질로 종사자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하지만 기피 아파트로 찍히면서 배달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변화를 모색했다. 최근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민이 1층에서 직접 음식을 받아가는 시스템을 정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hum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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