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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아버지와 딸 합장묘에서 나온 환약 성분에 학자들 ‘경악’
1600여년 전 中동진시대 막강 실력자 왕빈
합장된 딸 왕단후에 신경흥분제 먹여 중독
생식능력 잃고 결혼 못했을 가능성

죽은자는 말이 없어도, 죽음은 침묵으로 말을 한다. 사진은 중국 허난성 뤄양의 유물 발굴 모습

[헤럴드경제=김능옥 선임기자] 중국 난징(南京) 샹산(象山)에서 1965에 발굴된 아버지와 딸 합장묘가 50년도 더 지난 지금 또 다시 화제다. 학자들은 딸의 유골 옆에서 발견된 200여개의 환약 성분 분석을 통해 아주 이례적인 부녀합장의 의문을 풀 작은 고리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환약의 성분을 알고는 몹시 분노했다고 한다. 대체 무엇이 이 학자들을 화나게 했을까.

1600여년 전 부부 아닌 부녀 합장묘 ‘이례적’…200여 환약 발견

중국 고대의 기본 장례 방식은 토장이다. 황제의 인척이든 백성이든 모두 땅에 묻혀 사후의 안식을 얻고자 했다. 토장의 형식도 다양했다. 그 중 하나가 합장이다. 통상적으로 부부나 모자와 같은 직계친속이 합장을 한다.

중국 고대인의 사후세계에 대한 가치관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땅에 묻혀 평안을 얻는 ‘입토위안’이고 또 하나는 전세(转世)와 윤회다. 바로 이러한 관념의 영향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합장의 방식을 취한다. 합장은 대부분 부부간에 이뤄진다. 예전 부부가 합장을 해야 내세에도 그 인연이 계속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모자나, 부자의 합장도 있다. 이러한 합장은 기본적으로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이 상대방을 떠나기 싫어하거나, 상대방 옆에 놓이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1965년 난징 샹산에서 발굴된 부녀합장묘는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버지와 딸이 합장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 경우였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고, 심지어 어떤 지역의 여성들은 죽은 후에 조상과 가문의 무덤에 묻힐 수도 없었다. 하물며 부녀합장이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 무덤이 발견되고 고고학자들이 대단한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학자들은 연구를 통해 이 묘의 주인이 동진(317~420년)의 귀족 왕빈(王彬)임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묻혀 있는 사람은 왕단후(王丹虎)라는 그녀의 딸인 것도 알아냈다. 단연 관심은 왕빈이 딸과 함께 매장된 이유였다.

환약 성분 우스산(五石散)이 뭐길래…학계 ‘발칵’

중국의 인터넷 매체 텅쉰왕(騰訊網) 따르면, 이러한 의문은 왕단후 옆에서 발견된 200여개의 환약을 통해 풀렸다. 전문가들은 환약의 화학성분 분석을 알고서 경악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무덤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무덤의 진귀한 부장품이 중국 역사, 문화의 퍼즐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 기대는 200여개 환약의 성분 분석 이후 분노로 바뀌었다. 이 환약의 정체는 바로 우스산(五石散)이었다. 왕빈의 딸, 왕단후의 죽음도 이 약물중독이 원인인 것으로 추정됐다.

전문가들의 사료 조사를 통해 이 사건의 전말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왕빈은 동진 원제의 심복이었으며, 동진의 전체 관료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음이 밝혀졌다. 이런 실력자가 왜 딸을 결혼시키지 않고 자신과 함께 묻었을까.

고고학자들은 묘지(墓志 )기록을 통해 이에 대한 답을 찾아냈다. 묘지에는 ‘왕단후는 58세에 죽었고, 사후에 그의 아버지와 합장하였다.’ 라고 적혀 있었다. 고대에 여성은 일단 출가를 하게 되면 한평생 시집에서 생활해야 했고, 죽은 후에도 시가의 무덤에 묻혀야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왕단후의 경우는 여러가지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녀의 남편이 죽어서 친정으로 돌아왔거나 아니면 아예 출가를 하지 못해 아버지와 함께 묻힐 수 밖에 없었을 가능성이다.

중국 속담에 ‘황제 딸은 시집갈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다. 왕빈과 같은 실력자 역시 딸에 어울리는 가문을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딸이 출가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그렇다면 왕단후의 남편이 죽었을 가능성은 있는가? 이 가능성 또한 거의 없다고 학자들은 봤다. 왕단후가 출가했다면 시집 역시 대단한 귀족 가문이었을 테고, 남편이 죽었다고 해도 시가에서 평생 왕단후를 거두지, 친정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불로장생 믿었던 우스산, 마약 전락…딸은 중독

전문가들은 묘지에서 발견된 200개의 우스산 통해 그 의문을 풀 실마리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우스산은 고대 도술사들이 불로장생을 위해 만들어낸 환약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장생불사의 약이 되기는커녕, 일종의 신경흥분제(마약)로 전락해버렸다.

우스산을 섭취한 사람은 활력이 넘치고, 몸에는 주체할 수 없는 정력이 넘치는 환각에 빠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동진에서는 우스산이 매우 유행했다. 하지만 우스산에는 다량의 중금속이 함유돼 있어서 인체에 심각한 후유증을 유발했고 이 때문에 훗날 이 약을 만드는 사람은 자취를 감췄다.

동진 시대의 사람들은 우스산이 몸에 좋은 건강식품으로 여겼다. 우스산은 원재료도 희귀하고, 제조 공정도 복잡해서, 이를 누리는 것은 당시 권문귀족들만의 특권이었다.

왕단후는 이러한 우스산을 구할 능력은 없었다. 왕단후가 우스산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아버지 뿐이었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우스산을 왕단후에 건넸고, 왕빈은 우스산이 좋은 약이라 생각해서 자신의 딸에게 먹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약의 복용이 도리어 딸의 건강을 해쳤고, 이로 인해 왕단후는 생식능력을 잃게 돼 결혼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왕빈과 왕단후가 합장되게 된 유력한 이유 중 하나”로 꼽았다.

kn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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