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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자배달·방역회사…무대 멈춘 배우들 “오늘도 투잡 뜁니다”
코로나 장기화로 공연 잇단 취소
배달·택배·방역…생활전선으로
일자리도 없어 대부분 몸 쓰는 일
 
팬데믹 이후 배우간 소득 양극화 심화
“출연료 등 구조개선 없으면 뮤지컬계 무너질 것”
제작사 EMK, 앙상블 배우에게 재난지원금 지급
코로나19로 설 자리를 잃은 배우들이 공연장 밖으로 나와 생활전선으로 뛰어들고 있다. 5년차 뮤지컬 배우 김재우는 ‘피자 배달’ 알바 3주차에 접어들었다. [김재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5년차 뮤지컬 배우 김재우(30)는 ‘피자 배달’ 알바 3주차에 접어들었다. 이전까진 ‘쿠팡맨’이었다. “쿠팡맨을 하다 보니 무릎이 많이 상하더라고요. 이러다간 무대에서 춤을 출 수 없을 것 같아 그만두고 피자 배달을 시작했어요.”

대비도 없이 찾아온 코로나19로 배우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 무대를 떠난 배우들은 공연장 밖으로 나와 생활전선으로 뛰어들고 있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에 따르면 2020년 뮤지컬 개막 편수는 791건. 전년(2019년 2247건 개막) 대비 무려 1456건 줄었다.

생계의 타격은 업계의 근간을 이루는 배우들부터 시작됐다. ‘일당’을 받으며 무대에 섰던 무명배우들의 생활이 위태로워졌다. 지난해 뮤지컬 ‘썸씽로튼’에 출연한 앙상블 배우 권수임(29)은 “코로나19로 많은 작품들이 연기·취소되고, 좌석 띄어앉기 등 여러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다 보니 출연료 또한 받지 못해 일상생활에도 타격을 받는 상황도 생겼다”고 말했다. 일부 배우가 아니라면 사정은 비슷하다. 업계에 따르면 다수의 배우들이 전공을 살려 음악이나 무용, 연기레슨을 하거나 전혀 다른 업종으로 아르바이트를 겸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일자리도 많지 않다. 김재우는 “알바 자리가 많지 않아 주변의 남자 배우들은 대부분 몸을 쓰는 일을 한다”고 말했다.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를 통해 주연급으로 발돋움한 배우 김주왕은 코로나19가 닥친 이후 골프장 아르바이트를 하다, 방역회사(바이오 프로텍트)에 취업했다. [김주왕 제공]

앙상블로 출발,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를 통해 주연급으로 발돋움한 배우 김주왕(34)은 코로나19가 닥친 이후 골프장 아르바이트를 하다, 방역회사(바이오 프로텍트)에 취업했다. 그는 “코로나19로 뮤지컬 오디션도 줄면서 버티기가 어려워졌다”며 “배우 생활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탄력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해 선택했다”고 말했다. 항균 특수 방역업체에서 근무하며 그는 TV 프로그램 ‘우리 이혼했어요’(TV조선)나 ‘개는 훌륭하다’(KBS2) 등 제작 현장으로 방역을 가기도 했다.

무대가 멈추자, 배우들의 상실감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서편제’에 캐스팅된 김재우는 코로나19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한창 공연 중인 상황이다. 전작이었던 ‘엘리자벳’부터 이름 있는 조연으로 작품을 했던 터라 꿈을 이뤄가는 성취도 컸다. 그는 “예정대로라면 10월부터 연습에 들어갔겠지만 아쉽고 속상한 마음도 크다”라며“배우가 되겠다고 서울에 온지 10년이 됐는데 다른 일도 아닌 ‘팬데믹’으로 무대에 서지 못하는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방역회사에 취업해 근무 중인 배우 김주왕 [본인 제공]

익명을 요청한 한 앙상블 배우는 현재 의류 브랜드 매장에서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관객이 아닌 고객을 만나고 있다. 그는 “뮤지컬 배우의 꿈을 키우며 무대에만 서는 것이 바람이었는데, 이젠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커진다”고 말했다. 김주왕은 “굶어 죽어도 무대에서 죽을 거라는 마음으로 배우 일을 하고 있는데, 지금은 언제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을지 불안감이 크다”고 했다.

무대가 사라지고, 생활이 어려워지니 직업에 대한 고민도 생겨난다. 그나마 공연이 꾸준히 이어졌던 권수임도 “공연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고 말했고, 지난해 한국을 찾은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에 출연했던 배우 강기헌(29)도 현재 다른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오페라의 유령’에 출연하며 생활 유지는 됐는데, 이제는 버티기가 어려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모든 배우가 생활전선으로 뛰어든 것은 아니다. 이름 있는 주·조연 배우들은 방송이나 영화 출연을 겸해 생계에 위협을 받지는 않는다. 심지어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일을 하지 못 하는 경우도 있다. 배우마다 속사정이 다르다. 업계 관계자는 “앙상블 배우 중엔 제작사와 1년 단위로 계약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무대에 서지 못해 수입이 없는 데도 감염 위험이나 다른 사정으로 아르바이트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와 보낸 지난 1년, 뮤지컬계는 스태프는 물론 배우 간의 빅부격차를 다시 확인했다. 관계자들은 “코로나 이후 주조연 배우와 앙상블 배우간의 출연료 격차 등 뮤지컬계의 병폐가 다시금 드러나고 있다”며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낸다.

대형 뮤지컬의 경우 톱배우가 2000~3000만원 대의 출연료를 가져갈 때, 앙상블 배우는 평균 10~30만원 대의 출연료를 받는다. 앙상블이나 조연 배우도 연차마다 개런티가 달라 먹고 사는 일도 제각각이다. “최저 임금도 받지 못하는 배우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호소가 나오는 이유다. 하루에 11시간씩 배달일을 하는 조연급 배우는 “무대에 섰을 때나 알바하는 지금이나 수입은 200만원 중반 정도로 비슷하다”라며 “한 달 월급을 받으면 연습실 빌리고 레슨 받고 월세 내는 것으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공연 중인 ‘베르나르다 알바’에 출연 중인 배우 정영주는 “후배들을 보며 무대에 서는 것보다 알바로 먹고 사는게 낫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다”라며 “코로나로도 힘들지만, 뮤지컬 계는 배우 간의 출연료 격차 등과 같은 고질병을 해결하지 못하면 이로 인해 먼저 무너질 것”이라고 한탄했다.

배우 권수임 [본인 제공]

지금 당장은 출구가 보이지 않아도, 무대는 배우들을 다시 이끌고 있다. 권수임은 “힘이 들다가도 관객을 만나면 무대 위에서 살아있음을 느껴 버티고 있다”고 했고, 강기헌도 “다른 일을 찾고 있지만, 배우를 그만 둘 생각은 없다”고 했다. 김재우 역시 도리어 “지금의 고난이 배우로서 더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형 제작사 등 업계에서도 배우들에게 힘을 보태려는 움직임이 나온다. EMK뮤지컬컴퍼니는 지난 연말 온라인 유료 공연을 연 ‘몬테 크리스토’ 공연 수익을 스태프와 앙상블 배우 70~80명에게 긴급재난지원금 형식으로 제공했다. 유료 관객은 1만명이었지만, 엄홍현 EMK 대표가 사비를 보내 100만원씩 지급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앙상블 배우는 “제작사도 힘든 시기인데 고통을 나누고 어려운 배우와 스태프를 도와주자는 취지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려운 때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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