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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남 해남윤씨 어초은종가, 녹우당·노비문서 등 다양한 국보·보물·문화재 보유 [남도종가의 재발견 -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고문서 2500점·전적 3000권 보전
백성세금 대납…곳간열어 구휼도
녹우당 사랑채

해남윤씨 어초은종가의 윤두서(1668~1715)는 다빈치 처럼 인문학, 의학, 천문학, 미술, 지리, 기하학, 병법 등에 두루 능했다. 그와 아들 덕희, 손자 용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면서도 그림을 잘 그린데다, 자화상이 국보(제240호)가 되고 영화 ‘관상’의 메인타이틀이 되면서, 윤두서 일가의 예술가 이미지가 강한 듯하다.

윤두서의 화풍은 겸손과 친서민의 특징을 보인다. 공재의 절친, 담헌 이하곤은 자화상을 보고는 “신선이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진실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기품은 돈독한 군자”라 평했다. 벼슬을 마다한채 대동여지도보다 150년 빨리 ‘동국여지지도’를 만들고 천문학,수학책도 펴냈다.

윤선도(1587~1671)-윤두서-윤형식의 해남윤씨 어은초파는 처가 해남정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이를 백성 구제에 썼던 윤효정이 최고 조상이다. 해남윤씨 시조인 고려 문종때 사람 윤존부의 12세손이다. 종가는 백성의 세금을 세 번이나 대납하고 곳간 문을 열어 구휼했다.

재테크도 탁월했다. 14세 윤의중~16세 윤선도는 노화도 석중마을앞, 진도 임회면 굴포리 등지를 간척해 토지를 넓혔다. ‘유배가 직업’이라는 촌평을 듣는 고산은 남인의 거두, 대군들의 스승이었다가 정쟁에 휘말려 낙향한뒤 간척을 도왔다. 음악도 잘해 고단할땐 거문고를 타며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보길도 부용동, 현산면 금쇄동 원림을 예술적으로 잘 조성한 것 등은 탄탄한 경제력과 이를 잘 관리한 경영능력에 힘입은 바 크다. 모든 전각과 문화재가 모두 경제력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윤형식 전남종가회장은 사랑채 건물은 효종이 스승인 고산선생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선도의 ‘충헌공 가훈’은 아들에게 쓴 편지다. 수신(修身)과 근행(勤行)으로 적선(積善)하고 인자한 행실(仁行)을 제일의 급선무로 여기며, 구습과 폐단을 고치라고 가르쳤다.

윤두서의 증손자며느리 광주(廣州)이씨 종부는 종가살림살이를 세세히 기록한 규한록을 남겨, 조선 남서지방 안방살림꾼들의 교과서가 됐다.

이 종가는 국보 외에도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 ‘윤고산 수적 관계문서’, ‘지정14년 노비문서’등 보물들, 고산유고 목판, 사적 녹우당과 보길도 세연정원림, 천연기념물 비자나무숲, 고문서 2500점과 전적 3000권 등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함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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