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섣달’이라고 합니다. 섣달은 유일하게 순우리말 이름이 남아 있는 달로 보입니다. 섣달은 사실 ‘설’과 관련이 있는 달입니다. 옛말을 찾아보면 설날이 ‘섯날’으로도 나옵니다. 섣달은 ‘설이 있는 달’인 셈입니다. 그런데 설이 있는 달이 아니라 그 전 달을 섣달이라고 부르는 점은 수수께끼입니다.
일 년 중에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를 ‘아세(亞歲)’라고도 합니다. 아세는 ‘버금가는 설’이라는 의미입니다. 동지는 음기(陰氣)가 극에 달하는 시기인데, 달리 말하면 양(陽氣)가 강해지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때를 일 년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동지 다음날이 일 년의 시작인 설날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설날은 ‘태양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은 태양과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나이를 나타내는 ‘살’도 설과 어원이 같습니다. 동지는 12월 21~23일께인데 주로 음력 11월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동짓달은 음력 11월입니다. ‘동지섣달에 꽃 본 듯이’ ‘동지섣달 기나긴 밤’ 등의 표현이 있는데 이는 동지와 섣달이 함께 묶이는 경우가 많음을 보여줍니다. 음력 11월이나 12월이 원래 설이라는 생각도 있었던 듯합니다. 한 해의 시작점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음력을 보면 한 해의 시작인 설의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중국에서는 설날을 ‘춘제(春節)’라고 하는데, 한국에는 설에 봄이 안 옵니다. 엄청 춥습니다. 왜 설날이 한 해의 시작일까요? 춘제라고 하면 봄의 의미이니, 한 해의 시작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만 우리에게 설은 봄과도 관련이 없는 때입니다. 오히려 11월, 12월이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낮이 길어지는 때이므로 새해의 시작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믐’이라는 말은 ‘그믈다’와 관계가 있습니다. ‘가뭄’은 ‘가물다’와 관련이 됩니다. ‘가물’이 그대로 ‘가뭄’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믈다는 옛말에서 ‘어두워지다’는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믐은 ‘달이 사라져 어두워진 때’를 의미하는 말로 보입니다. 그러니 ‘섣달그믐’은 ‘설이 있는 달의 마지막 날’이라는 의미겠죠. 그믐날은 달마다 돌아오지만 섣달그믐은 한 해의 마지막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감회가 있습니다.
‘동지, 섣달그믐, 설날’이 모두 새해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새해는 매일 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해가 날마다 뜨니 새 해는 매일 오는 것이기도 하죠. 그래도 일 년에 하루 정도는 지나간 날을 맺고 간다는 점은 좋은 것 같습니다. 툭툭 털어버리고 새롭게 길을 떠날 수 있게 하는 거죠. ‘송년(送年)’이라는 말이나 ‘망년(忘年)’이라는 말에서 ‘보내고 잊으려 하는 마음’을 읽습니다. 슬픈 일도, 힘든 일도, 기쁜 일도, 즐거운 일도 기억 속으로 보냅니다. 올해가 다시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돌아봤을 때 아릿한 추억일 수 있습니다.
올해는 참으로 힘든 한 해였습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많았습니다. 돌이켜보고 싶지 않고, 그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루를 보낸 분도 많을 겁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에 여전히 괴로움이 깊이 쌓입니다. 그래도 동지는 오고, 그래도 섣달그믐은 옵니다. 그래도 날마다 해는 새로 뜹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