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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팀장시각] 치킨시트 클럽

2002년,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지검 검사장이었던 제임스 코미는 업무파악이 끝난 뒤 검사들을 불러 모아놓고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이나 불일치 평결을 한 번도 안 받아본 사람이 있습니까?” 자신을 가장 뛰어난 소송 전문가라고 여긴 검사 몇몇이 손을 들었다. 코미가 답했다. “여러분은 겁쟁이 클럽(Chickenshit Club) 회원입니다.”

이 내용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칼럼니스트 제시 에이싱어가 쓴 책 ‘치킨시트 클럽’의 한 장면이다. 책 제목은 코미 검사장의 일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저자는 거대 금융자본에 무력한 검찰을 비판한다. 복잡하고 피곤한 사건을 피하는 현상은 역설적으로 실패하지 않는 검찰을 만든다.

2001년 ‘엔론’ 분식회계 사건이 터졌다. 정직원만 2만2000여명에 달하던 회사가 선물투자에 의존하다 파산하자 주주들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은 휴짓조각이 됐다. 하지만 금융피해 책임을 묻는 과정은 매우 험난했다. 엔론은 가장 유능한 변호인단을 대규모로 꾸렸고, 검사 몇명으로 조직된 태크스포스는 인적·물적 열세였다. 법무부 관료들은 엔론 전담팀을 ‘기소권을 남용한다’거나, ‘사건에 무모하게 대처한다’며 고깝게 봤다. 엔론의 설립자인 케네스 레이는 부시 가문에 오랫동안 거액을 기부했던 사람이었고, 조지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법무부 장관이 된 존 애시크로프트 역시 후원을 받던 인사였다.

얼마 전 사표를 낸 김범기 대전고검 검사에게 연락한 적이 있다. ‘사표를 낸다는 게 사실이냐’고 묻는 게 편한 일은 아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도 냉랭했다. 하지만 ‘모뉴엘 사건’ 얘기를 꺼내자 목소리가 누그러지며 웃음소리와 함께 “그건 내 인생사건”이라고 말했다. 가전업체 모뉴엘의 3조원대 사기대출 돌려막기와 8억원대 정·관계 로비 실체가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는 금융 사건 전문가 중 한 명이었지만, 여권 실세인 손혜원 의원을 기소한 뒤 지난 2월 대전고검 검사로 발령 나며 수사업무에서 배제됐다.

뉴욕 남부지검처럼, 우리나라도 여의도를 관할하는 서울남부지검에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2014년 설립됐다. 정치적 편향성 시비가 끊이지 않는 특수·공안부서와 달리 금융위원회나 금융감독원과 협업해 자본시장법 위반 사범들을 기소하는 전담 기구였다. 하지만 초대 합수단장이었던 문찬석 검사장은 추미애 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와 인사를 비판하다 검찰을 떠났다. 시세조종 분야 ‘블랙벨트’ 인증을 받은 검찰 내 금융사건 전문가였다. 합수단장 재직 때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한 이유정 전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미공개 정보 주식거래 사건을 기소했던 박광배 부장검사 역시 옷을 벗었다.

검찰의 직접 수사는 축소해야 하지만, 금융기구와 협업하던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개혁 대상인지 의문이다. 6년 동안 여의도를 감시했던 합수단이 폐지된 사유를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합수단을 “부패의 온상”이라고 비난했을 뿐이다. 국가 예산과 시간을 투자해 길러낸 검찰 내 금융수사 전문가들을 좌천 인사로 내쳤다. 막상 금융수사 전문가들이 방패로 옷을 갈아입으면 뉴욕 남부지검의 ‘치킨시트 클럽’ 일화는 더 이상 먼 나라 얘기가 아닐 텐데, 이것을 검찰 개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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