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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포] “대목인데 다 타버렸어…” 코로나·장마 이어 화재, 청량리시장 상인들 ‘망연자실’
“장마로 한짝에 18만~19만원 사과 수백만원어치가 타버렸다”
“코로나19는 견뎠는데 예상하지 못한 화재까지”…깊은 한숨
화재 당시 스프링클러 작동 안 해…동대문구청 “의무 설치 대상 아냐”

지난 21일 오전 발생한 화재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청과물시장 내 점포 9곳과 창고 1곳이 불에 탔다. 같은 날 오후 찾은 시장에서 화재 피해가 심한 것으로 보이는 한 점포는 천장이 무너져내려 하늘이 보일 정도였다. 주소현 기자

[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우리 통닭 가게가 저 안에 타버렸어.” 폴리스라인 바깥쪽에 앉아 있던 60대 명모 씨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같이 말했다. 지나가던 주변 상인들이 “언니, 가게 탔어”라고 묻자 그는 “홀랑 타 버렸다. 2000만원은 손해날 것 같다”고 답했다. 같은 시장에서도 화를 입지 않은 상인들은 “그깟 판자때기 불탄 게 대수냐, 사람 목숨이 먼저”라며 위로를 건넸지만 화재를 겪은 상인들은 “추석 대목에 과일도 다 날린 데다 장사를 못해 큰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 21일 오전 4시32분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청과물시장 2번 출입구 40m 안쪽에서 시작된 불길은 전통시장 67개 점포 중 9곳, 청과물시장 150여개 점포 중 10곳, 과일 냉동창고 1곳 등 총 20개 점포를 태우고 오전 11시53분께 완진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10분께부터 연기와 냄새가 나기 시작해 4시30분께 불길이 일었다. 소방 당국은 과일창고 부근에서 화재가 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정확한 원인은 감식을 통해 이날 중 발표될 예정이다.

같은 날 오후 3시께 청량리전통시장과 청량리청과물시장의 출입 통제가 일부 풀리면서 상인들은 자신의 가게에서 과일을 들어내고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상자를 나르는 지게차와 소방관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들의 오가는 발밑으로 겉이 검게 그을린 귤들이 으깨져 젖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청량리전통시장 통닭 골목과 등을 맞대고 있는 과일 가게 9곳과 냉동창고 중 피해가 심한 일부 점포는 천장이 주저앉아 하늘이 훤히 보였다.

화재가 난 창고의 관리인인 40대 정모 씨는 “창고 안에서 잠을 자다 불이 나 겨우 빠져나왔다”고 했다. 주변 상인들은 “10분만 늦게 나왔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그의 안부를 물었다. 해당 창고는 과일 가게 10여곳이 세를 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화재가 나지 않은 일부 과일 가게 상인도 하루아침에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 상당의 과일을 잃었다. 정씨는 “가게마다 품목과 가격이 다 다르지만 과일을 보관하던 상인도 최소 2000만원씩은 손해 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재로 가게가 타 버린 상인 홍모(55) 씨는 “창고 안에 산더미같이 과일을 쌓아놨는데 가게며, 창고며 전부 타 무너져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 과일은 손도 못 댔다”며 “2500만~2600만원어치는 날린 셈이다. 올해 사과 단가도 유독 비싸 한 짝에 18만~19만원씩 했다”고 말했다. 추석은 물론 가게 정리를 하면 연말까지는 장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는 홍씨의 뒷말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견뎌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니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또 다른 피해 상인 40대 김모 씨는 “천장이 폭삭 주저앉아 밤새 사과 900궤짝이 불타 버렸다. 올해 과일은 예년보다 곱절은 비쌌다”며 “우리 가게만 해도 약 1억원은 손해 본 셈인데 다른 가게도 상황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연신 보험사에 전화를 걸며 가게 안을 들여다봤다. 홍씨 역시 “화재 피해를 본 가게들은 대부분 목조 건물이라 보험이 안 되고, 되더라도 보험료가 5배가량은 비싼 셈이라 가입한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1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청과물시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다량의 과일들이 불에 타거나 폐기 처분됐다. 같은 날 오후 상인들이 그 중 피해를 보지 않은 샤인머스캣과 배를 골라내 헹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주소현 기자

골목 한쪽에서는 덜 탄 샤인머스캣과 배 상자를 뜯어내 분류하는 작업도 한창이었다. 피해 상인들은 검게 그을린 비닐 포장을 뜯어내고 샤인머스캣들을 물에 헹궜다. 배 상자를 뜯어내던 상인 A씨는 “안 그을린 건 팔 수 있냐. 판다고 해도 어디서 파냐”며 헛웃음을 지었다.

불이 난 가게 맞은편 상인들은 “우리 가게는 다행히 과일이 타지는 않았지만 골목이 이렇게 돼서 당장 장사를 못하니 어떡하냐. 추석 열흘 남은 지금이 대목”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들은 “45년간 이 시장 골목에서 장사하며 이렇게 크게 불이 난 건 처음” “우리 골목은 아니더라도 다른 골목에서는 종종 불이 났었다”는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전통시장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지적은 번번이 반복돼왔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김형동(국민의힘) 의원이 이날 소방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전통시장 화재는 92건, 재산 피해액은 약 1279억원에 달한다. 바로 지난해에도 울산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설을 앞두고 새벽에 화재가 발생해 상인들이 피해를 봤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화재 당시 경보는 울렸으나 스프링클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동대문구청 측은 “화재가 난 가게들은 무허가도 있고,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 대상이 아니었다”며 “화재를 수습하고 원인이 밝혀진 이후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addressh@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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