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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옵티머스 사태로 전례없는 위기…“리스크 관리 강화할 것”
취임 8개월, 코로나 겹쳐 리더십 시험대
채권 시가평가제 도입·2004년 펀드넷 구축 참여
“국민경제 사명감…시장안정 최선”

고 2때 안경 깨져 ‘색맹’ 알아
이과서 문과 전환 경제사 관심
법학도 됐지만 경제학 부전공
역동적 행정에 끌려 행시 도전
이명호 한국예탁결제원 사장이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예탁원 사옥에서 헤럴드경제와 사장 취임 후 첫 인터뷰을 갖고 예탁원 사장에 취임하기까지의 이력과 취임 소회·경영 목표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부터 옵티머스펀드 사태까지 한국예탁결제원에 전례 없던 위기 상황이 이어지며 취임 8개월차를 맞은 이명호 사장의 리더십이 본격 시험대에 올랐다.

대우사태 때 특별대책반으로 위기 현장에 투입돼 대우채권 편입 수익증권 환매 대란을 막아낸 이 사장이 이번에도 구원투수 역할을 해낼 것인지 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국민경제에 대한 사명감으로 꽉 차있었다”는 젊은 시절처럼 위기 대응 능력을 발휘하려는 그를 헤럴드경제가 만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사장은 사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이과생이었다. 물리, 화학을 열심히 공부하던 그가 문과로 마음을 바꾼 계기가 ‘안경’이었다는 걸 아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우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학교 건강검진일에 안경이 깨진 것. 초고도 근시였던 그는 흐릿해진 렌즈 앞에 검사지를 바짝 갖다 대어 색맹검사를 치렀지만 결과는 색맹 판정이었다. 당시엔 이과 진학 포기 사유였다. 실망할 법도 하지만 세계사, 그 중에서도 경제사가 금세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역사를 보다 보니 생산력의 차이가 한 시대를 규정짓더라고요.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생산력이 변화하고, 또 그에 따라 사회구조가 변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상과 철학은 별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됐죠. 특히 1400~1500년대 신대륙 발견부터 영국의 산업혁명까지 유럽이 팽창하게 된 부분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서울대 법대 83학번으로 입학해 법학도가 됐지만, 경제학에 대한 애정은 계속됐다. 부전공으로 경제학 공부를 했다. 당시 법대에서 유일하게 부전공을 선택한 2명 중 한 명이 그였다. 법대생이라면 으레 준비하던 사법고시 대신 행정고시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도 그래서 하게 됐다.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던 제가 공직에 들어오게 된 것은 은사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사법부도 사법적극주의를 통해 사회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지만 새롭게 (정책을) 만드는 역동적인 영역은 행정이라고 하셨죠. 82~84학번이 상대적으로 행정부에 많이 진출하는 분위기이도 했고, 재경직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됐습니다.”

행시 33회로 공직에 입문한 이 사장은 상공자원부, 재정경제부 사무관을 거쳐 1999년 금융감독위원회(현재 금융위원회)에서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이끌던 금융시장 특별대책반에 들어가면서 대우사태라는 역사적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서게 된다.

대우사태는 재계 서열 2위였던 대우그룹이 사업 확장을 위해 과도한 차입에 의존했다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높아진 금리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해체되는 사건이었다. 30년 넘는 공직생활 중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일이다.

이 사장은 “우리나라 경제의 상당 부분이 다 대우와 얽혀 있었다. 협력회사든 관계회사든 규모가 컸다”며 “한 쪽에서 기업구조조정을 진행하는 한편, 다른 한 쪽에선 금융시장에 대한 파급효과를 최대한 차단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해야만 했다”고 회고했다.

“저는 대우 채권이 포함된 수익증권의 환매안정 관련 대책을 맡았는데, 당시만 해도 투자신탁 상품이 예금처럼 인식될 때였습니다. 만약 일시에 환매 요구가 오면 펀드런에 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일정 기간별로 기관별 환매율을 사전에 정하고, 늦게 찾을수록 회수율이 높아지도록 했습니다. 그 작업이 시장에서 통했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수익증권 문제가 해소됐죠. 그 일이 지금도 기억에 가장 많이 남습니다.”

국민경제를 위해 부실기업을 정리해야 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해외 근무 시절 폴란드, 우즈베키스탄 등에 세워진 대우 자동차공장을 둘러보며 대우의 공(功)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장은 “IMF 때 워싱턴 컨센서스를 하지 않았나. 부실기업을 정리하면 새 살이 돋아난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며 “그런데 유럽 PIIG(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재정위기 등을 보니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데 약간 동의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주인도네시아 대사관 공사 겸 총영사를 지내면서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다시 본 일도 있었다. 그는 “대우가 베트남에서 하던 글로벌 청년 사업가 양성 사업(GYBM)을 인도네시아에서도 했는데, 대우맨들과 졸업식을 찾은 은발의 김 회장을 뵀다. 세월이 흘렀지만 눈빛은 살아있더라. 먼 훗날 다시 공과를 평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대우사태는 그에게 또다른 과제도 남겼다. 2000년에는 대우사태 전후로 문제가 됐던 채권의 장부가평가를 시가평가로 전환하는 작업에 매달렸고, 2004년에 오픈한 ‘펀드넷’ 설립을 위한 실무 작업에도 참여했다. 현재 예탁결제원에서 펀드넷을 통해 마련하려고 하는 사모펀드 상호감시·견제 체계의 기반이 사실 그의 손에서 탄생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피곤하다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사태가 소프트랜딩(연착륙)해 시장이 안정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2주 가까이 잠을 거의 못 잤는데도 피곤한 줄 모를 정도로 국민경제에 대한 사명감으로 꽉 차 있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1월 말 예탁결제원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맞닥뜨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경영비전에 대한 고민을 더욱 무겁게 한다. 전 금융권으로 블록체인 도입이 확산하면서 예탁결제원의 입지가 좁아지고 생존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중이다. 실제 한국은행은 그동안 예탁결제원을 거쳐야 했던 채권결제 시스템을 블록체인 기반 플랫폼에서 구현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취임하자마자 가졌던 화두는 기술 발전으로 발생할 예탁결제 업무의 변화예요. 예탁·전자등록·결제 업무 수십만, 수백만건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게 우리 회사의 근간인데, 블록체인, 분산원장은 개별거래로 가는 겁니다. 우리가 선도적으로 변신하지 않으면 결국 침몰할 겁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변화가 더 빨라지고 있어 준비를 더 철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옵티머스펀드 환매중단 사태를 계기로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도 다시금 되새기고 있다. 이 사장은 “예탁결제원 업무는 국민재산과 관련된 부분이라 리스크 관리가 굉장히 중요하다. 예탁결제원에 등록된 금액만 5100조원이다. 재산을 불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지고 있는 재산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며 “외부의 비판적 시각을 참고해 리스크 관리와 관련된 후선업무를 더욱 강화하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직원과의 소통을 통한 사기 진작도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중단되기는 했지만 약 700명의 직원 중 절반 이상을 직접 만났다. 관(官) 출신이라며 취임을 반대했던 노조와도 만나 “함께 가겠다”는 진심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구성원 한 명, 한 명은 얘기하기 어려워 하는 쓴소리를 대변해서 해주는 게 노조”라며 “경영에 도움을 주는 빛과 소금 같은 역할을 한다”고 역설했다.

“손자병법을 보면 천시(天時)·지리(地利)·인화(人和)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는 얘깁니다. 소통을 통해 공감할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나갈 수 있는 부분이죠. 제가 임직원과 나누고 싶은 게 그겁니다.”

부산 본사와 서울 사옥·일산 센터 직원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회의 때마다 화상회의를 이용하는 것은 일상이 됐다. 그는 “부산에 있을 때나 여의도에 있을 때도 3원 화상회의를 한다”며 “코로나19로 전체적으로 화상회의가 활성화돼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라고 했다.

젊은 시절엔 바둑에 ‘미쳤었다’. 기보 공부도 하고 인터넷 바둑을 두기도 했다. 요즘엔 걷기에 푹 빠졌다. 이 사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해 지고 나면 3~4시간 걷는다. 걷고 나면 땀이 쫙 나고 정신이 맑아진다”며 다소 들뜬 목소리로 걷기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인생철학도 걷기와 비슷했다. “진실의 친구는 시간이고, 가장 큰 적은 편견이며, 영원한 동반자는 겸손이다.” 죽도록 최선을 다해 묵묵히 제 일과 역할을 했다면,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도 진심을 알아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어려운 업계 상황 속에서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일일이 수고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는 게 느껴졌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묻는 질문에는 ‘매트릭스’와 ‘아바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매트릭스 1편을 보고 영화 감독이 천재이면서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결합돼 있지만 구분이 잘 안 되지 않나. 현실이 가상이 되고, 가상이 현실이 된다. 여러 번 봤는데, 볼 때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생각하게 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조만간 공채를 통해 선발될 예탁결제원의 예비 직원들을 향해서는 “업무 성격을 잘 알고 왔으면 좋겠고, 거기에 더해 끈기와 인내심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며 마지막까지 조언을 잊지 않았다.

그는 “금융과 IT가 접목된 회사인 만큼 업무 관련 법·제도와 함께 코딩 등 IT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잘 적응해서 소프트랜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상수·강승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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