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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도1번지 강진①] 다산 맹약 200여년, 대를 이은 의리 [함영훈의 멋·맛·쉼]

[헤럴드경제=함영훈 여행선임기자] 다산 정약용에게 강진은 8할 이상이다. ‘빛나는 언덕’이라는 뜻의 금릉(金陵=강진)은 다산을 넉넉하게 품고 그의 지혜를 따랐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산이 사랑과 자유를 누리며 500여책 저술을 쏟아낼수 있도록, 붉고 푸른 멍석을 깔았다.

백운동 원림 근처, 월출산 아래 차밭
최고의 차는 대나무 이슬을 맞고 자란 야생 차나무에서 채취된 것이다.

여름 석달 내내 강진은 붉거나 푸르거나, 여러 색이 섞이기도 한 수국 천지다. 변화무쌍한 식생의 이곳에서 수국은 토양의 특성에 따라 하늘색, 보라, 연두, 핑크, 베이지색, 다색조화형 등 다양하게 피어난다. ‘진심’이라는 꽃말처럼, 수국 같은 이야기가 2020년 남도여행 1번지 강진을 감싼다.

월악산 남쪽 전남 최대 사찰 월남사 터 앞에는 이한영전통차문화원이 직영하는 ‘백운옥판차 이야기’라는 찻집이 있다. 차 문화는 사찰과 그 주변에서 발달했다. 물론, 오늘날 지리산 아래 어느 여승도량에선 에티오피아 아라비카 커피도 만만찮게 소진된다지만.

금릉(강진)의 인문학 찻집 백운옥판차 이야기

이 찻집 역시 앞마당과 울타리 밑에 수국이 가득하고, 한담(閑談)을 부르는 초가 정자가 편안하게 서있다. 이 모습을 임금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두손으로 옥판을 든 형세의 옥판봉과 월출산이 흐뭇하게 내려다본다.

찻집엔 다산 정약용 선생과 ‘다 계획이 있던’, 어리지만 가장 길게 의리를 지킨 제자 이시헌 사이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숨쉰다.

지난 3일 구름이 머물다 걷히고 있는 옥판봉과 월출산 기암괴석. 이 풍경은 다산과 이시헌의 운명적 만남이 있었던 백운동 원림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주인은 이시헌의 7대손 이현정(48) 박사. 이시헌은 월출산 옥판봉 아래 국가 명승 ‘백운동 원림’의 아홉 번째 동주(洞主:주인장)였다. 이시헌의 후손이자 이현정의 고조(高祖)인 이한영은 증조부터 자신까지 경기도 정약용 가(家)에 113년간 보내던 ‘백운옥판차(茶)’를 대중들의 건강차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차로 상표화했다.

2020년은 다산이 강진을 떠날 때 사제간 다신계(차를 통한 신의)를 맺은 지 202년 되는 해이다. 학문 성취도에 대한 편지와 시문, 엽차과 떡차를 번들로 보내기로 한 맹약이다. 소포를 받은 다산은 시헌에게 3증3쇄(세번 찌고 말리기) 제다법의 세부 기술, 학업에 대한 충고 등을 담은 답장을 보내곤 했다.

당대의 사제는 이승을 떠났어도, 다산과 시헌, 각각의 후손은 200년 넘게 ‘백운옥판차(백운동 정원에서 옥판봉을 보며 나누던 차)’ 우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백운동 별서정원의 유상구곡 자연계곡물 진입로

백운동은 사제가 운명적 조우를 한 곳이다. 강진에 유배되어 사귄 백련사(만덕사)의 혜장선사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이 ‘해동의 두보’라고 칭송했던 종교사상가이다. 그는 다산의 스승이자 제자이고, 아우이면서 친구, 후견인인데, ‘제다(製茶)의 달인’이라는 ‘부캐’ 재능이 역사를 만든다.

다산은 처음엔 혜장이 월악산 야생 찻잎으로 만든 차를 선물로 받았는데, 나중엔 “요즘 술이 안깬다, 사람을 살리라”는 호소와 “선사님 차가 대박!”이라는 내용의 시 ‘걸명소(乞茗疏)’까지 보내면서 차를 구하고 걸한다. 오죽하면 정약용의 호가 차나무 산(茶山)일까.

결국 응석 대신 배움을 택했다. 시헌은 제다지침서 ‘동다기’를 베껴써가며 통달해 새로운 시사점을 공유했으며, 다산은 대나무 이슬을 맞고 자란 야생 차나무가 더 구수하고 부드럽다는 점 등을 밝혀내고 한의학의 구증구포법을 원용한 새 제다법을 개발한다.

찻집에서 백운동 가는 1.4㎞길은 33만㎡(약 10만평) 드넓은 강진 차밭 사잇길로 걸어가는 것이 좋겠다. 월출산 기암괴석 능선이 호위하고, 푸른 차나무가 사단별로 종대를 이뤄 연쇄적으로 도열하니 장관이다. 군데군데 연대장처럼 어린 찻잎을 냉기와 서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서있는 바람개비(방상팬)가 멋진 소품이 된다. 멀리 남쪽으로 한옥식과 서양식 건물이 어우러진 마을이 착상해 스위스 농촌 부럽지 않은 풍경이 연출된다.

백운동 원림 운당원 대나무밭
다산이 시를 쓰자, 초의선사가 그림을 그렸다. 백운동에서 옥판봉을 바라보며 만든 백운첩은 백운옥판차의 기원이 되는데….

백운동 입구 구름다리를 건너면, ‘야생’ 차 나무가 동백과 섞여 자라나고, 잠시 후, 백운동 원림의 거대한 녹음 터널이 홍옥 같은 물방울을 떨구는 ‘홍옥폭’과 어우러진다. 별서정원 입구이다. 푸른 빛 바위절벽 ‘창하벽’을 원래 바위가 푸른 빛인 듯하고, 이끼가 뒤덮어 푸르기도 한 것 같다. 창하벽 옆 서쪽 문으로 들어서면 자연 옥수가 정원 안에 들어왔다 되돌아가 가는 유상구곡이 앞마당을 휘감고, 동쪽 문옆 왕대나무숲 ‘운당원’에서 산들바람이 건듯건듯 불어온다,

정선대에 올라 나뭇가지 사이로 고개를 내민 옥판봉을 감상한 뒤 본체인 백운유거로 가니, 정원을 처음 조성한 이담로(1627~1701)의 후손 이승현(61)씨가 청소를 하다가 일행에게 빙긋이 눈 인사를 건넨다. 유배12년차, 1812년 9월, 다산은 이곳을 처음 방문한다.

당시 여덟살이던 시헌은 다 계획이 있었다. 예복을 정제하고, 초등학교 2학년 나이 답지 않게 말투를 고쳐가며 다산을 대했다. ‘한국의 다빈치’ 앞에서, 면접으로 여긴 모양이다. 다산으로선 숨겨진 보석 관광지에 놀라움이 더 컸겠지만, 이시헌은 이때 다산의 가장 어린, 그러나 준비된 제자가 되고, 200여년 대대로 이어가는 가장 오랜 제자로 남는다.

이시헌의 증손 이한영은 일제때 우리 차인데 일본 상표가 붙자, 한반도 지도를 형상화한 무늬를 넣은 우리 상표 ‘백운옥판차’를 반포했다.

이한영이 일제시대때 반포한 백운옥판차 한반도 모양의 상표
서울에서 온 남도1번지 강진 답사객들에게 백운옥판차의 내력을 설명하는 이시헌의 7대손 이현정 박사.

이현정 박사는 사라지거나 빼앗길 위기에 처했던 ‘금릉월산차’, ‘월산차’까지 집요한 연구와 투쟁으로 부활시켜 3종 브랜드를 완성했다. 수국의 꽃말처럼, 202년간 이어진 ‘진심’어린 우정 스토리를 털어놓던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엔 모종의 결기가 들어있었다.(계속)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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