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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6년 손끝의 울림…‘46개 현’에 오롯이
코리안심포니의 산 역사…하피스트 윤혜순
유학시절 매일 11시간 연습, 피멍 든 손가락
국립오페라단 ‘마농’ 마지막 공연 후 은퇴

제자·딸과 ‘더 하프’ 창단…연주 인생 계속
“좋은 음악 들려드릴 수 있는 건 엄청난 일”

그리스 신화 속 여신들이 품에 안은 ‘천상의 악기’, 화려한 무도회(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2악장)나 천국을 상징(브루크너 교향곡 8번)하는 낙원의 소리. 우아한 선율을 연주하는 하피스트의 손끝은 단단하고 뭉툭하다. 탄탄한 마흔여섯 개의 줄을 다루는 프로 연주자가 되기 위해선 피멍과 피물집이 생기는 고난을 인내해야 한다. “하피스트는 손가락 관리와의 전쟁이에요. 물집이 많이 생기면 소리도 예쁘지 않기 때문에 연습도 요령있게 해야 하죠.”

하프와 함께 한 세월은 어느덧 46년. 열네 살에 처음 하프를 잡은 이후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27년을 몸담은 윤혜순(60) 수석 하피스트가 6월 말 정년을 맞는다. 코로나19로 관객과 만날 기회가 사라진 지금, 윤 수석이 코리안심포니에서 보내는 마지막 한 달엔 아쉬움도 묻어나고 있다. 윤 수석의 마지막 공연은 오는 25일부터 28일까지 무관중 생중계로 예정된 국립오페라단의 ‘마농’. 최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연습실에서 만난 윤 수석은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유르페우스 만든 ‘마이다스의 손’…“유재석씨한테 미안해요”=하프와의 인연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다섯 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던 윤 수석에게 하프를 처음 권한 건 친언니였다. “하프와 피아노의 악보가 같아요. 바이올린처럼 단선율이 아니라 오른손, 왼손의 양손 악보가 있어요. 피아노를 배워본 사람은 금방 할 거라고 해서 시작했어요.”

윤 수석이 하프를 처음 만난 1970년대는 하프라는 악기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던 시절이다. 그만큼 프로로 향하는 길도 험난했다. 그의 첫 스승은 우리나라에 하프를 처음으로 들여온 이교숙. 윤 수석은 그런 만큼 국내 하프 1.5~2세대인 셈이다. 이화여대 음대를 졸업한 그는 1986년 코리아심포니에 입단해 2년간 활동하다, 남편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피바디 음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하루에 9~11시간 연습만 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코리안심포니에 다시 입단한 것이 1993년이다.

하프는 다른 악기와 달리 대중과 친하지 않은 악기다. 그러다 최근 하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계기가 생겼다. 올 초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이 세 번째 ‘부캐’ 유르페우스로 변신, 하프에 도전하면서다. 윤 수석은 당시 유재석에게 당근과 채찍을 고루 주는 선생님이었다. 클래식을 ‘1도 모르는’ 유재석을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린 ‘마이다스의 손’이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단 네 번의 수업. 하루 연습시간은 고작 2~3시간이었다. 그것도 세 번은 연습, 마지막 한 번은 리허설이었기에 윤 수석은 연주의 완성을 위해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고 한다.

“연주는 실황이고, 잘못 하면 다시 할 수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더라고요. 사실 유재석 씨한테 제가 많이 미안해요. 힘들어하는 데도 계속 밀어붙였거든요. 근데 유재석 씨가 머리도 좋고, 기억력도 좋아요. 집중력도 뛰어나 결국 해내더라고요.”

방송 이후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엔 ‘하프를 배우고 싶다’는 메일이 줄을 이룬다고 한다.

▶코리안심포니의 산 역사, 첫 정년…“코심은 음악의 고향”=윤 수석은 창단 35년을 맞은 코리안심포니에서 더블베이스 홍석진과 함께 처음으로 정년을 맞는 단원이다. 코리안심포니의 ‘산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로 연주가 활발하지 않은 하프를 다루는 만큼 오래 연주를 하고 싶은 마음이 그를 오케스트라로 이끌었다.

윤 수석은 코리안심포니가 교향곡은 물론 오페라와 발레, 현대음악 등 다양한 연주를 한다는 점을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1년에 평균 110~120회 정도의 연주를 하는데, 코리안심포니는 개개인의 음악적 베이스가 풍부하다는 것이 굉장한 장점이에요. 코리안심포니만의 음색이 있고, 어떤 지휘자가 와서 요구를 해도 금방 알아듣죠.”

정년을 맞으며 지난 연주 인생을 돌아보니 많은 기억들이 스쳐갔다. “딸이 입시를 준비할 땐 일을 그만둬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연주를 하면 아이에게 시간을 못 주니까요.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다고 할 때 정말 힘들었죠.” 윤 수석의 딸은 엄마를 따라 하피스트가 됐다. 정작 윤 수석은 딸의 진로를 반대했다고 한다. “이 길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본인이 원하더라고요.”

하피스트가 된 딸과 한 무대에 섰던 날은 윤 수석이 가장 잊지 못하는 순간이다. 2013년 무렵 선보인 공연이었다. 모녀 하피스트의 이야기가 더해진 연주에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2014년엔 제자들과 함께 하프 앙상블 ‘더 하프(The Harp)’를 창단했다. 앙상블 창단 멤버엔 윤 수석의 딸도 있다. ‘더 하프’는 전국을 순회하며 하프를 알리고, 클래식 음악의 문턱을 낮춘다. 오는 10월부턴 인천아트센터에서 매달 무대가 예정돼있다. 오케스트라 단원 생활을 마무리하지만, 하피스트 윤혜순의 연주 인생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마농’의 한 음 한 음을 연주하는데 이 곡이 이렇게 아름다운 곡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코리안심포니는 제 음악에 있어 고향 같은 곳이에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음악이 직업이긴 하지만, 좋은 음악으로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더라고요. 직업인으로 그런 음악을 들려드릴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에요. 오래 해온 만큼 할 수 있을 때까지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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