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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앤스토리] 법조인이자 경영인으로…‘법무법인 율촌 20년’ 일궈낸 우창록 명예회장
변호사 6명으로 시작해 20년만에 850명 식구 ‘법률가들의 마을’ 안착
조세 전문 변호사 1호… 판·검사 거치지 않고 김앤장에서 경력 시작
자기 주장 강한 ‘변호사 우창록’ 지우고 경영인으로 변신 성공
설립자 기득권 버리고 65세 정년 지켜… 후임 인선도 관여 안해
IMF 시대 기업과 동고동락…“준법경영 목소리 내기 어려워” 지적도
“죽음을 대비하는 과정 필요, ‘시니어’들의 인생 마무리 도울 것”
우창록 회장은 국내로펌으로는 처음으로 복지향상을 위해 사내 카페테리아 겸 도서관을 만들었다. 이상섭 기자

[헤럴드경제=좌영길 기자] 국내 5대 로펌으로 꼽히는 법무법인 율촌은 조세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며 빠르게 성장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와 법무법인 광장이 1970년대에 출발했고, 법무법인 태평양과 세종이 1980년대 초반에 설립된 점을 감안하면 1997년 법인을 세운 율촌은 후발 주자인데도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변호사 6명에서 시작한 율촌은 이제 850명의 식구를 거느리고 연 매출도 수천억 원에 달하는 큰 기업이 됐다. 설립자인 우창록(67·사법연수원 6기) 명예회장의 전문성과 경영능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율촌의 역사와 고스란히 함께했던 우 변호사는 이제 명예회장 직함만 갖고, 회사 경영에서 손을 땠다. 설립자도 정관으로 정한 정년 65세에 맞춰 은퇴를 하고, 후임 경영자도 선출에 의해 정하도록 하는 모범 사례를 남겼다. 인생 2막을 준비중인 우 변호사를 만나 율촌과 함께한 20년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 회장의 결단으로 율촌은 별다른 지분 분쟁 없이 후임 대표들이 선출돼 조직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다. 율촌은 ‘변호사 우창록’이 아니라 그 자체로 브랜드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오랜 생각이다. “하루 이틀 생각한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평생 구상했던 걸 실행했을 뿐이죠. 율촌이 좋은 조직으로 남는 게 제가 가장 바라는 소망입니다.”

그는 후임 선출에도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경선을 하지 않고,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방식을 권유했다. 개인역량보다 팀플레이를 강조하는 것은 그의 오랜 경영 철학이었다.

“내 생각에 잘 할 것 같은 사람을 세우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떠날 사람이었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선을 하면 파가 갈릴테고, 상처가 생기면 다시 묶기가 힘드니까요.”

율촌은 이 과정을 통해 추대된 윤용섭(65·10기), 강석훈(57·19기), 윤희웅(55·21기) 변호사가 공동 대표를 맡아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우 회장은 “추대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결론을 보니 내가 바랐던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

우창록 회장은 국내 조세 전문 변호사 1세대로 꼽힌다. 율촌 역시 조세 분야에 강점을 가진 로펌으로 꼽힌다. 이상섭 기자

율촌(律村)이라는 이름은 법률가들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화합을 강조한다. ‘법률가 우창록’과 ‘경영자 우창록’이 나뉘는 지점도 같은 맥락이다. 법조인으로서는 자기 주장이 강하고, 얽매이기 싫어하는 기질 때문에 공직을 거치지 않고 변호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일단 창업을 한 뒤에는 철저하게 협업을 중시했다.

어렸을 때 막연하게 검사가 되고 싶어 법대에 진학했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우 회장은 대부분 판사나 검사 임용을 거치던 1970년대 통례를 깨고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막상 사법연수원에 가보니, 판사나 검사는 내 마음대로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앤장 변호사도 항상 소신껏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사건을 맡아 결정을 해야 하는데, 회사 김앤장의 의견과 제 개인 의견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내가 생각을 바꾸거나, 회사가 의견을 바꾸거나. 아니면 내가 나오는 수밖에 없었죠. 결국 제가 나오는 길을 택했습니다. 집에 가서 ‘앞으로 한 6개월 생활비를 못갖다줄 수도 있겠다’고 했어요. 아내가 ‘아무려면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보다 못하겠냐, 옳다고 생각하시는대로 하라’고 하더군요. 용기가 났습니다.” 1992년 ‘우창록 법률사무소’를 열게 된 계기다.

다행히 일은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조세 자문이 로펌의 주요 업무 분야이지만, 그 때만 해도 조세법 전문 변호사가 없었다. 사법시험 합격 후 대학원에서 조세법을 공부했던 게 우 회장으로서는 인생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김앤장에서 우 회장에게 일을 맡겼던 현대그룹은 40대 초반이었던 우창록 변호사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신뢰를 보냈다. 우 회장은 1300억원대 조세 사건을 맡아 4년만에 승소 확정 판결로 의뢰인의 신뢰에 보답했다.

법무법인 율촌은 1997년 시작됐다. IMF 금융위기가 오기 직전이었다. 우 회장과 함께 윤세리(67·10기), 강희철(62·11기), 정영철(65·13기), 한봉희(62·16기), 한만수(62·13기) 변호사 등 6명이 창립 멤버였다. 그동안 소신이 강한 법률가 우창록이 경영인으로 바뀌어야 하는 시작점이었다.

“한 번도 규모를 키우는 게 목표인 적은 없었어요. 아주 초기부터 제도화, 시스템화 하자고 했죠.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죠. 누가 수임하더라도 그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한다, 역량을 모아서 일을 한다는 신뢰를 주자. 이런 생각을 수없이 말하곤 했습니다.”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가 더 많은 수익을 가져가는 문화가 율촌에는 없다. 어떤 일이든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팀을 구성하고, 실적에 따라 배분한다. 사건 수임을 중시하는 ‘전관 마케팅’이 없어 오히려 장기적으로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된다.

경영자로서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우 회장의 생각은 율촌의 이름에서도 잘 나타난다. 설립자의 성을 따 영문작명을 하는 다른 대형로펌과는 달리 율촌은 영문으로도 ‘Yulchon’이다. “10주년 때 이름을 계속 가져갈 것인지 토론을 했어요. 한글이름은 율촌, 영문은 ‘우윤(Woo Yoon)’으로 하기로 했죠. ‘강,정,한’을 더 붙이면 너무 길기 때문에 줄이자는 걸 고맙게도 동의해줬습니다. 하지만 한 조직이 쓰는 이름이 둘인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의사를 다시 물었고, 만장일치로 ‘율촌’ 하나를 쓰기로 했죠.” 조직을 객관화하는 것, ‘변호사 우창록의 로펌’이 아니라 율촌이라는 이름이 그 자체로 가치를 갖도록 하자는 결정이었다.

조세전문 변호사로서, 97년 설립한 율촌을 키워낸 경영인으로서 우 회장은 IMF 시대 우리 기업이 드러낸 속살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증인이기도 하다.

“IMF를 겪으면서 기업문화가 획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때 소송을 당한 감사 한 분은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책임을 왜 져야 하느냐’고 했어요. 상법상 감사에 관한 규정을 보면 감사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쁜짓 안했으니 잘못한 게 없다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잡아내야 하는 게 감사거든요.”

우 회장은 경제성장기와 지금의 경영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금융위기를 겪고, 기업의 체질 변화가 이뤄졌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다. “그동안 기업이 효율지상주의로 갔던 점은 이해가 갑니다. 그 연배에 있던 분들이 회사법을 잘 몰랐죠. 컴플라이언스(준법경영) 분야로 가려는 법조인 수가 적고, 회사에서도 그 목소리를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기업을 사유하는 문화가 남아있고, 경영방식을 지적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독립성과 힘을 보장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율촌은 2017년 설립 20주년을 맞아 삼성동 파르나스타워에 새 둥지를 틀었다. 이상섭 기자

경북 경주 출신으로, 한때 국민학교만 졸업할 생각이었던 우 회장은 진학을 권유한 선생님을 만난 덕에 경주 문화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고, 법조인이자 경영인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성공한 것 같으냐는 질문에 “어렸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됐다”고 말하는 그는 6명의 변호사가 모여 율촌을 설립하고 회사를 키우던 시기가 가장 즐거웠다고 회상한다. 경영일선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우 회장은 앞으로 은퇴한 시니어들을 위한 일을 구상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죽어라 일을 해왔던 세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 부를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고, 마지막 가는 길을 어떻게 정리할지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죽음을 예상하고, 대비하는 과정은 필요합니다. 재산을 많이 남기기보다 자식들이 내 사후에 다투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자식들이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것. 법률가들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죠.”

jyg9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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