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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 세 번 재판받을 권리의 함정

만약 재판 당사자가 항소심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는데, 변호사가 대법원에서 결과를 뒤집어주겠노라 호언장담한다면 그 말은 96% 이상의 확률로 의심해봐야 한다.

우리는 당연히 세 번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 이 권리는 당연한 게 아니다. 예전에는 일정한 요건을 갖춘 사건만 대법원 심리를 받을 수 있는 ‘상고 허가제’가 운영됐다. 하지만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폐지됐고, 지금은 1년에 4만건 이상의 사건이 대법원에 접수된다.

2015년은 양승태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도입에 사활을 건 시기였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뺀 12명의 대법관이 4만건이 넘는 사건을 제대로 처리할 리 만무했다. 대법원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에서 해법을 제시하는 기능을 해야 하는데, 이 기능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상고법원은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세 번 재판 받겠다는 요구를 모두 받아주면서도, 3심 재판을 대법원이 아닌 별도의 상고법원에 맡기고 대법관들은 중요 사건만 맡는 제도였다. 하지만 이 제도는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받지 못하고 실패했다. 대법원은 핵심을 제대로 짚지 못했다.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홍보 영상을 만들고 온라인 광고도 했지만, 대법관이 격무에 시달리고 중요 사건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하소연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얼마 없었다. 실책이었다. 대법원은 스스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상고심 제도를 뜯어 고쳐야 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지금 대법원은 정상적이지 못하다. 사법제도가 정상 궤도에 오른 나라 중 대법관 12명이 4만건의 사건을 처리하는 곳은 없다. 그게 국민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줘야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법원이 결론을 바꾸는 비율은 평균 4% 남짓이다. 그마저도 ‘다시 심리하라’는 것이지, 3심 재판을 요구한 쪽에 유리한 쪽으로 결론나는 비율은 더 줄어든다. 2심 결과에 불복해 대법원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란 그야말로 희망고문일 뿐인 셈이다. 정말 국민을 위해서라면 ‘3심 재판을 다 받아줄 테니, 대법관들은 중요한 사건만 하게 해주자’ 가 아니라, ‘상고해도 대법원은 원하는 결과를 주기 어렵다’고 솔직하게 털어놨어야 했다.

법원은 분쟁해결의 종착지가 돼야 한다. 송사 몇년이면 집안이 거덜난다는 얘기는 우스개 소리가 아니다. 대법원에서 결과가 뒤집히는 확률이 희박한데도, 몇년이나 분쟁을 더 이어가야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사건 당사자에게도 이롭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3심 요구를 다 받아주는 대신 대법관들은 중요 사건을 하게 해주자’던 상고법원은 법률서비스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 중심의 사고에서 나온 제도였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하거나,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상고심 제도를 고치자는 주장은 일종의 금기어가 됐다. 하지만 1년에 수만건의 사건이 대법원으로 가고, 짧게는 2~3년에서 길게는 5~6년까지 분쟁이 길어지는 건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지금이라도 ‘희망고문’을 끝낼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 이것은 대법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jyg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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