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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랏빛 향기를 남기고 떠난 허수경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나는 귤을 쪼갰다. 귤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가기 전에 쓰는 글들’에서)

지난해 10월 타계한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난다)이 출간됐다. 시인의 마지막을 담은 글들은 세상의 번잡과 소요 넘어 깊은 곳, 투명한 곳에 가닿는다. 그래서 그의 시에 다가가는 건 우리 안의 더러움과 추함이 드러나는 고해성사와 같다.

이 유고집은 허 시인과 후배이자 동료 김민정 시인의 우정의 산물이기도 하다. 허 시인은 몇 달 남지않은 생의 마지막 항암치료를 앞두고 김 시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썼다. 쓰고 있는 작은 시집이 있는데 내달라는 편지였다. 원고는 메일로 보낼 테니 오지 말라고 했다. “너를 보면 겨우 참았던 미련들이 다시 무장무장 일어날 것 같아. 시인이니 시로 이 세계를 가름하는 걸 내 업으로 여기며 살아왔으니 마지막에도 그러려고 한다”는 편지였다.

유고집은 시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한 김 시인이 고인의 집 마당 가득한 보랏빛 잔대꽃을 보고 보라색으로 표지를 꾸몄다. 유고집은 2011년부터 2018년까지 시인의 컴퓨터에 ‘글들’이란 폴더에 들어있던 7년간 써내려간 시작 메모와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이후 타계 전까지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시, 작품론과 시론 두 편을 담았다.

‘내 안에서 자고 있던 수많은 문장이 울음을 터뜨리다가 내 속에서 나오니 말간 햇빛이 되네’‘시간을 정확하게 해체할 수 없는 순간에 시는 온다’‘쉽게 이해가 되는 시. 그러면서도 미학적 긴장이 떨어지지 않는 시’‘너무 시를 쓰려고 하는 것, 그것이 시인을 자꾸 불편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등 시인의 시작 메모에는 시에 다가가고자 하는 치열함, 본질을 꿰뚫는 투명함이 녹아있다.

고고학자로서 인류와 도시의 폐허와 영원을 함께 봐온 시인의 사유가 담긴 유고산문집은 내년 시인의 생일에 나온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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