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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00여년 간 살아있는 인쇄박물관...충무로인쇄골목 가보니
제지·후공정 등 출판·인쇄분야 5500여개, 1만2000명의 생업터
가게 문만 열면 40~50년된 장인…서울시 ‘다시.세운 프로젝트’ 2단계 구역
2020년 진양·인현상가에 보행데크, 필동길과 남산순환로까지 입체 보행

[헤럴드경제=한지숙 기자] ‘귀돌림, 타공, 오시…’.

지난 26일 찾은 서울 중구 마른내 4길. 한 가게 유리문에 의미를 알 듯 모를 듯한 낱말이 적혀있다. 야트막한 높이에 10평 남짓한 크기의 이런 영세 가게들이 골목 양편으로 오밀조밀 붙어있다. 성인 두명이 간신히 지날수 있을 만한 비좁은 골목은 구불구불 어지럽게 이어졌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비슷한 가게들이 연속되는 또 다른 골목의 시작이다. 마치 옛 풍속화에 현대 제품을 넣은 어느 가전 회사의 콜라보 광고처럼 1970년대 거리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온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이런 감상을 깨운 건 골목을 수시로 오가는 ‘삼발이’ 오토바이 소음이었다.

충무로 인쇄골목의 '필수 아이템' 삼발이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있다. [서울시 제공]

삼륜 오토바이는 이 곳 충무로·을지로 인쇄골목에서 없어선 안될 운송수단이다. 업체는 모두 분업화, 전문화 돼 있다. 명함만 제작하거나 금박만 입히는 식이다. 삼발이 오토바이는 인쇄 공정의 단계 마다 필요한 가게를 찾아 다니며 작업 물량을 실어나른다. 귀돌림은 제지의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하는 것, 타공은 구멍내는 일, 오시는 종이가 잘 접히도록 누름선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까 가게 문에 귀돌림, 타공, 오시라고 붙여놓은 건 그 업무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란 뜻이다.

흔히 충무로를 영화의 거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거리의 터줏대감은 인쇄다. 시초는 600여년을 거스른다. 지하철 충무로역 인근 남산스퀘어(충무로 3가 60-1) 빌딩 앞에 세워진 ‘주자소(鑄字所) 터’ 표지석으로 유구한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주자소는 조선시대 활자를 주조하고 책을 찍어내는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이다. 1403년 태종이 고려말기 서적원 제도를 이어받아 지금의 충무로 지역에 주자소를 설치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지역 행정동명도 주자동이다. 1621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훈도방주자동지’에 따르면 주자동에는 서적을 인쇄하는 이들이 모여 살았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야장, 글자를 배열하는 균자장, 인쇄를 담당하는 인출장 등 당시에도 활자 주조와 책자 인쇄까지 전문 분야별로 분업화돼 있었다. 어쩌면 그 장인의 후예가 지금도 충무로 어딘가에서 가업을 잇고 있을 지 모를 일이다.

충무로 인쇄골목의 한 제지업체에서 오토바이에 물건을 싣고 있다. [서울시 제공]

마른내 4길과 6길이 인쇄골목의 중심가다. 행정동은 건천(乾川)동이다. 건천동은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일제 치하에서 마른내가 일본식 표기로 바뀌고 일본 상인들이 상권을 장악하자, 광복 이후 일본을 쫓아내기 위해 용맹한 충무공의 이름을 따 지역명을 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골목 한복판에 일본식 적산가옥도 아직 남아있다. 을지로 방향으로 1950년대부터 자생한 골목시장 인현(仁峴) 시장이 붙어있다. 인현은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의 집이 있던 자리란뜻의 인성붓재, 한자로 인성부현을 줄여서 부른 이름이다. 포장마차와 식당들 사이에 인쇄소가 뒤섞여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30일 서울시에 따르면 인근 필동과 광희동까지 아우르는 인쇄산업특정개발진흥지구(30만㎡)에 서울 전체 인쇄업의 67.5%가 자리해 있다. 특구 내 인쇄 관련 업체는 5500여곳, 종사인원만 1만2000여명이다. 낡은 흑색사진 속 풍경 같은 충무로인쇄골목은 한때 개발논리에 치우쳐 한꺼번에 밀려버릴 위기도 있었지만, 실상 4~50년 된 장인들의 생업 현장이자, 창작물의 생산기지로서 미래 세대의 독립출판과 디자인의 꿈이 영그는 자리인 것이다. 이 날 기자와 동행한 이 란 서울시 ‘지붕없는 인쇄소’ 소장은 “이 곳을 다녀가는 많은 분들이 ‘이걸 없애는 건 정답이 아니지 않느냐’고 한다”면서 “이 곳은 ‘책 만드는 마을’, ‘장인의 마을’로서 산업 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살아숨쉬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충무로 무림갤러리 내부에는 신진작가의 페이퍼아트가 전시 중이다. [무림페이퍼 제공]

서울시는 ‘다시·세운 프로젝트’ 2단계 구역으로서 내년 4월까지 진양·인현상가에 보행데크를 신설하고,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창작인쇄업 거점공간을 마련한다. 앞서 지역민의 소통공간으로서 진양상가에 ‘지붕없는 인쇄소’를 뒀다. 1인기업 입주공간, 샘플작업실, 교육시설 등을 집약한 핵심거점인 ‘인쇄 스마트앵커’를 새롭게 건립하고, 인쇄 관련 스타트업 입주공간인 ‘창작큐브’를 설치한다. 일자리‧살자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청년주택도 400가구를 공급한다. 진양상가에는 책을 내고 싶은 독립출판작가와 세운상가 일대 인쇄업체가 만나 협업하고 독자들은 독립서적을 구매할 수 있는 공간이, 인현지하상가에는 인쇄기술학교, 공방, 인쇄박물관 같은 시설이 각각 들어선다.

지난해 9월 세운상가~청계‧대림상가가 공중보행교와 보행데크로 연결된 데 이어, 내년에는 대림상가를 넘어 삼풍상가를 지나 퇴계로와 맞닿은 진양상가까지 총 1㎞에 걸친 세운상가군 7개 건축물 전체가 보행길로 연결된다. 종묘에서 시작해 세운상가를 거쳐 남산까지 이어지는 서울의 남북 보행축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란 소장은 “지역민과 계속해서 소통하면서 지역민이 원하는 공간과 적합한 콘텐츠를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보행데크에 누워 시민들이 쉬면서 책을 읽으며 쉬는 그림을 떠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2단계 보다 먼저 재생을 마친 1단계 구역(세운·청계·대림상가)은 인근 을지로 맛집들과 함께 ‘뉴트로(New+Retro;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 유행을 타고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끌며 지역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지붕없는 인쇄소는 출판·인쇄 유관기관 종사자와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책거리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책거리 투어는 주자소터에서 시작해 레터프레스-POD(Publish On Demand·주문형출판)-무림갤러리-마른내4길·6길-인현시장-진양상가로 이어지는 1시간 코스다.

js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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