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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 칼럼-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흙수저라 부르지 마오

  • 기사입력 2019-04-1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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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수저계급론’이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에 따라 자식의 계급이 저절로 나뉜다는 자조적인 표현이다. 말장난처럼 유행되었다가 금방 사라져간 다른 대부분의 신조어와 달리, 2015년경에 태어나 수년 째 계속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현실을 잘 반영한 표현일 것이다. 신조어는 언어활동을 풍부하게 함과 동시에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는 긍정적인 기능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생산되었던 많은 신조어들이 눈에 보이지 않은 권력의 이동이나 조정에 의해서임을 ‘발칙한 신조어와 문화현상’에서 밝힌 바 있다. 신조어 뒤에서 성, 부, 상술, 고용, 디지털 등이 권력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그래서 수저 계급론은 우리 의식의 지표가 어디 있는지를 살펴보게 해준다.

새삼스럽지만, 흙은 씨앗들을 생명으로 키워낸다. 봄꽃이 피는 창밖의 풍경에서 보듯이 모든 식물들이 흙에서 생명력을 얻고 열매를 맺는다. 땅에서 솟아오른 풀과 나무의 열매를 초식동물들이 먹고 살아가고, 육식동물이 이 초식동물들을 먹고 살아가며, 인간이 이들을 먹고 살아간다. 다른 생명들을 위해서 흙은 겸손하게 모든 것들의 발아래 있다. 땅은 모든 것의 지지대이고 우리의 기본 환경이 된다. 어찌 흙수저인가. 모든 생명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고 주변을 받쳐주는 헌신적인 능력의 사람을 흙수저라고 부르면 모를까.

한편, 소설가 박완서 씨가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내놓았을 때, 정말 흥미로운 신조어를 만난 듯 설렜던 기억이 있다. ‘싱아’는 우리가 사용하지 않아 죽다시피 했던 단어였다. 그런데 땅속에 숨어 있던 씨앗이 싹이 되어 치솟아 오르듯, ‘싱아’는 한 작가에 의해 우리 문학과 삶 속에 유년의 기억을 돌이켜 주는 단어로 싱싱하게 자라났다. 신조어가 해야 하는 기능이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흙수저는 여전히 돈의 힘에 의해 인간을 분류하는 부정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환지통’(송은상)이 떠오른다. 당시, 사람들은 이 표현이 두통과 치통처럼 고통의 한 종류임을 잘 알지 못했다. 환지통은 팔다리를 절단한 환자가 이미 없는 수족에 아픔과 저림을 느끼는 현상으로, 가령 잘린 왼쪽 다리의 몇 번째 발가락이 가렵다고 호소하는 증상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시인이 되고자 했던 소망을 잃어버린 채 어느 날부터 자꾸만 겨드랑이가 가려운 증상을 느낀다. 잃어버린 부분을 자각하는 증상이었다. 의학용어 ‘환지통’을 문학적인 신조어로 바꾸었다고나 할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자각이 환지통이라면, 수저 계급론으로 인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자각해야 할 것 같다. 부모의 경제력이 약하다하여 흙수저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적인 모욕에 가깝다. 위험해 보이는 이 언어의 칼날은 결국 우리로 향해 있다. 환경과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흙의 소중함과 개인의 노력에 의한 끝없는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흙에서 올라오는 생명을 아름답고 귀하게 느끼는 세대여야 금도 은도 제대로 사용할 것이다. 들에 핀 백합화가 솔로몬의 영광으로 입은 것보다 더 아름답다 하지 않던가. 우리의 후대들을 꽃처럼 귀하고 아름답게 여긴다면, 함부로 흙수저라 부르지 마오.

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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