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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 “의원님들, 법대로 합시다”
“법대로 해, 법대로.” 시비가 붙으면 다짜고짜 법을 들이대는 모습을 주변에서 심심찮게 보게 된다. 요즘은 보험사가 알아서 처리해주지만, 얼마 전까지도 차량 접촉사고가 나서 쌍방 과실 비중을 따지면서 운전자 간에 ‘법대로’를 외친다. 경찰서 야간 당직실에는 쌍방 폭행으로 경찰 조사를 받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들도 ‘법대로’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든다.

준법정신이 투철한 것인지, 아니면 변호사 2만명 시대에 송사(訟事)가 일반적인 것이 됐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제 ‘법’을 입에 올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됐다.

도가도비가도(道可道非可道).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풀이해 보자. 법이 촘촘히 삶을 규율하면서 이미 법이 사회질서 유지의 원래 취지를 넘어서서 우리 삶의 일부가 돼 버렸다.

굳이 고전 문구를 끌어온 것은 춘추전국시대 ‘공자왈 맹자왈’하기 위함이 아니다. 노자의 무위(無爲) 자연을 옹호하기 위함도 아니요, 법가에서 말하는 법치를 주장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팍팍한 한국인의 삶을 위해 의미가 퇴색해 버린 ‘법대로’의 의미를 다시 꼽씹어 보자는 것이다.

법을 만드는 곳은 국회다. 국회를 입법부(立法部)라고 하고, 국회의원은 영어로 ‘lawmaker’라고 한다. 우리 삶에 대한 다종다양한 법이 국회에서 제정된다. 그러나 지키라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정작 국회의원들이 무시하기 일쑤다. 예산안 처리의 법정 시한을 넘긴 것이 바로 그 예이다.

국내 최상위법인 헌법은 제54조제2항에서 “정부는 예산안을 회계연도 개시 90일 이전까지 국회에 제출해야 하고,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의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내년 예산안을 12월 2일까지 의결해야 한다. 그러나 2000년부터 2011년까지 다음 연도 예산안이 헌법이 정한 시한 이내에 처리된 경우는 단 한 차례에 불과하다.

예산안이 법정기한 내에 처리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입법기관인 국회가 헌법을 어긴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2012년에 국회법 개정을 통해서 ‘예산안 및 세입예산안 부수법률안의 본회의 자동부의제’가 도입됐다.

국회법 제85조의3에 따라 “위원회는 예산안과 세입예산안 부수법률안의 심사를 매년 11월 30일까지 마쳐야 한다. 위원회가 이때까지 심사를 마치지 못하면, 그 다음 날(12월 1일)에 위원회 심사를 마치고 본회의에 부의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예산안 자동부의제의 핵심내용이다.

문제는 예산안 자동부의제가 시행된 이후로도 국회가 법정 기한을 준수한 것은 2015년도 예산안을 심사한 2014년 한 해 밖에 없다.

예외 없는 규칙이 없듯이 이 조항에도 단서가 달려 있다. 국회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지난 3일 본회의를 열고 자동부의된 예산안을 상정하면서도, 향후 일정을 놓고 여야 간 합의를 계속 촉구했다. 그럼에도 여야의 대립은 격화할 뿐 좀체 합의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회의원들에게는 총론적 성격이 강한 헌법을 무시하는 것은 둘째치고 각론에 들어가 국회 활동을 규정한 국회법까지 이들이 따라야 할 기준이기보다는 당리당략에 따라 언제든 폐기하고 무시해도 되는 걸림돌로 전락시켜 버렸다.

정치학자인 상탈 무페는 “민주주의는 중립적인 지형 내에서 일어나는 얌전한 합의가 아니다”고 설파한 바 있다. 민주주의를 “확고한 정체성을 믿는 집단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기존 질서를 긴장시키는 사투고, 전면전”이라고 정의한다.

타협과 절충의 미덕보다 자신만의 사상으로 무장한 진영간의 격렬한 토론이 민주주의를 성숙시킨다고 강조한다. 민주주의는 완성의 이데올로기기가 아니고 항상 과정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야 간 소모적인 정쟁과 대립은 결국 국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일자리 예산, 기업지원 예산 등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예외가 많은 법이라면 당연 새로운 법을 만들어야겠지만 그런 생각의 발로가 현행법을 무시하고 각 당의 전략적 판단에 따르도록 하는 데까지 이른다면 국민의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 법대로 하자.

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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