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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정수립 100년-잊혀진 사람들③]임정 국무총리 출신 독립운동가 노백린…묘는 1993년에야 돌아왔다
노백린 장군의 후손인 노영탁(80)광복회 강북구지회장. [사진=김성우 기자/zzz@heraldcorp.com]

-항일운동가 노백린 장군 후손 노영탁 선생 인터뷰
-“아직도 할아버지 돌아가신 정확한 원인 몰라”

[헤럴드경제=김성우 기자]독립운동가 노백린 장군에 대해 기록된 공식적인 사인은 ‘병환’이다. 1875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노 장군은 활발한 독립운동 활동을 이어가다 1926년 중국 상하이에서 작고했다.

구한말 신식군대 장교로 복무했고, 무장독립운동에도 힘써온 노 장군의 일생과는 걸맞지 않는 기록이다.

손자 노영탁(80) 광복회 강북구지회장은 “당시 돌아가셨던 많은 독립운동가들 중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없는 경우 사인이 병환으로 기록됐다”면서 “(조부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병환으로 기록됐을 뿐,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그의 강북구 소재 자택에서 만난 노 지회장은 이에 “조부의 정확한 사인을 찾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만남이 진행되는 약 1시간여 동안 그는 또렷한 어조로 조부의 행적이 인정받지 못하는 현재 상황에 안타까워했다.

그의 집 거실 소파 뒷편에는 조부 노 장군의 행적을 담은 사진들이 구한말 활동 당시부터 국권상실 이후까지 일대기 순으로 걸려 있었다. 

노백린 장군의 모습. [제공=한민족문화대백과]

노 장군은 구한말부터 활동했던 엘리트출신 독립운동가였다. 국비장학생으로 뽑혀 1890년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했고, 이후에는 신식군대 장교로 복무하며 군대해산시까지 병사 양성과 국방에 몸담았다. 안창호ㆍ신채호 선생등과 함께 신민회의 창립맴버였고 국권상실 후에는 무장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비행학교를 만들고 비행기를 모집하기도 했다.

활동반경은 미국과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중국(상하이) 등으로 넓었다. 지난 1923년부터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現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며 1926년 작고 때까지 활동했다.

김구ㆍ안창호ㆍ박은식 선생 등과 함께 활동했던 노 장군이지만 그의 독립운동 활동이 인정된 것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여 당시다. 이전까지는 국가 차원에서 노 장군의 업적이 인정받지 못했다.

여기에 대해 후손 노 지회장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감정이 있어서 그런지 이승만 박사는 함께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면서 “1960년대 들어서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노 장군의 묘도 1993년까지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남아 있었다. 1949년께 중국 정부에서 노 장군의 묘를 이전해 가라는 요청이 왔지만 당시 한국 정부는 이를 외면했다.

그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냉전이 격화되며 공산당이 차지한 중국 대륙과 자유진영의 대한민국의 국교는 단절됐다. 노 장군의 묘도 상하이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노 지회장은 “국교가 정상화되고 중국과의 관계도 개선됐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야 조부의 묘역을 이전해와 현충원에 모실 수 있었다”고 했다.

노 지회장이 조부의 모습을 사진을 통해 소개하는 모습. [사진=김성우 기자/zzz@heraldcorp.com]

오는 2019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 대한 국가차원의 진상규명은 아직 미흡하다는 중론이다. 시간이 흘러 사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점은 이같은 문제를 더욱 심화하고 있다.

노 장군도 마찬가지다. 행적에 대한 기록이 많이 사라진 상황이다. 노 지회장도 이같은 모습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도 분명히 많은 활동을 하셨을 것 같은데 정확하게 확인된 내역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면서 “조부가 인정을 받으려고 그런 활동을 하신 것은 아니지만, 행적이 묻히는 점에 대해서는 많이 아쉽다”고 했다.

zzz@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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