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 버스는 아르젠티나 광장 앞도 지나갔다. 버스 정거장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이 이 도시에서 가장 크다는 서점이었다. 그녀가 읽어낼 수 있는 책들은 한 권도 없었지만 B가 여기 와서 읽었을 만한 책들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지나갔다.”(조경란의‘ 매일 건강과 시’에서) |
역사속 의문의 사건 다룬 스릴러
국가 주도 출산·육아 비판 내용도
섬세하고 탄탄하게 이야기를 직조해내는 소설가들이 돌아왔다. 내면의 갈피를 조심스럽게 들춰내 그 미세한 흔들림을 보여주는데 능란한 조경란, 굵직한 서사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김별아와 김탁환,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쓴 낯선 이야기들로 우리의 무감각을 일깨워온 구병모와 김금희의 소설이 나란히 나왔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두고 서점가가 서서히 달궈지는 모양새다.
조경란의 소설집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문학과지성사)는 ‘일요일의 철학’ 이후 5년 만이다.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는 이번 소설집에는 답답하고 정처없어 보이는 주인공들이 주로 등장한다. 불안이 나날이 된 이들에게 내일이란 단어는 사치일 뿐, 겉으로나마 아무 일 없이 하루 하루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불안하지도 않고 거리낌도 없는 기분이 드는 하루를 가져보는게 소원”인 일상에 자의적 타의적으로 작은 균열이 생기는 것으로 소설들은 시작된다.
단편 소설 ‘11월30일’의 훈은 휴학한 상태다. 학비도 없고 내일도 기약할 수 없는 그는 지하철역 입구에서 미키마우스 탈을 쓰고 어학원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 불안하고 한편으론 어떤 일이 주어질까 봐 두려운 마음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이다. 동생의 죽음으로 말까지 더듬게 된 그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한 농장을 찾는다. 농장의 아주머니가 훈이 가족과 어떤 관계인지, 엄마가 꼭 받아오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훈은 달걀 두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탄다. 마침 광화문 광장의 집회로 환승하지 못하고 떠밀리듯 무리에 섞인 훈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열심히 “지금 여기를 통과”하는데 집중한다. 그것도 달걀판을 껴안고 위태로운 상태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서울역 환승센터까지 걸어낸다. 그리고 훈은 소리내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오, 오늘이 말해주고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는 내, 내 내일이 말하게 하라”고 소리친다.
또 다른 소설 ‘매일 건강과 시’의 그녀는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하며 마흔을 앞둔 어느 날, 이탈리아 출신의 시인이자 강사인 B의 흔적을 찾아 그가 살았던, 그리고 참사를 당한 도시로 떠난다. 한 번도 살던 곳을 떠난 적 없는 그녀에게 B의 죽음은 탈출의 빌미를 제공한다. B는 그녀에게 다다르고 싶은 시로 통하는 문이었다. 한 달간 이국의 낯선 도시의 광장과 서점을 오가며 B의 흔적을 밟아가는 그녀의 속에는 말이 쌓여가고 응축된다.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비, 바람, 햇빛/오늘 같은 날/절벽의 집들은 빛나고/내일보다 젊은 이 순간’이란 몇개의 문장을 끄적이며 시의 언저리에 가 닿길 희망한다. 내내 답답한 안개에 갇힌 채 그저 열심히 걷다보니 길 같은 게 조금 보이는 것도 같은 소설들이다.
무대는 ‘반도미싱’, 공상수는 이 회사 영업부 팀장대리다. 눈물 많은 상수의 영업전략 역시 감성적 접근, 이를테면 미싱 대신 실꾸러미를 들고 다니며 아날로그의 힘을 강조하는 전략이다. 띨띨한 그를 직원들은 ‘따’시키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이진 못하는데, 상수의 부친이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회장과 친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팀원 하나 없는 상수의 팀에 ‘문제 직원’ 경애가 배치된다.
소설에는 상처 입은 이들이 주류를 이룬다. 상수와 경애는 물론 경애의 엄마. 경애의 친구인 일영과 미유, 조선생, 반도미싱의 팀장 김유정까지, 이들은 이별과 죽음, 냉대와 굴욕의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고 꿋꿋이 견뎌낸다. 그런 와중에 서로를 통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경애(敬愛)’의 마음을 배워나가면서 스스로 단단해져 간다.
소설은 이 공동주택의 뒤뜰에 놓인 식탁의 묘사에서 시작한다. 입주자 대부분이 앉을 수 있는 근사한 핸드메이드 식탁이다. 입주자들이 담소와 함께 즐거운 식사를 하는 풍경을 떠올릴 법하지만 분위기는 편치 않다. 일상을 나누며 허물없이 지내길 바라는 쪽과 그럴 처지가 안돼는 쪽, 공동체와 넘지 말아야 할 선 등 미묘한 가치들이 매끈한 식탁 아래서 부딪히면서 파열음이 난다. 의심없이 쓰는 따뜻한 공동체라는 단어의 서늘한 구석을 작가는 집요하게 드러낸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