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변호사’ 고진은 답을 얻기 위해 종횡무진한다. 그는 검은 얼굴에 비뚤어진 입술을 가진 30대 독신남성이다. 판사였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법복을 벗고 알음알음 사건을 해결하는 뒷골목 변호사가 됐다. 고진은 살인 사건에 연루된 모든 이들을 탐문한다. 그의 화두는 범행동기. 그는 결국 친절한 이웃의 가면을 벗기고 살인마를 밝혀낸다.
고진은 가상 인물이다. 판사 출신 추리소설가인 도진기(50) 변호사의 작품에 단골로 등장한다. 생김새와 성격, 직업까지 도 변호사를 빼닮았다. 하지만 사고방식은 전혀 달랐다. 고진 시리즈를 처음 쓸 때, 도 변호사는 13년차 법관이었다. 살인자의 내밀한 사정은 법관에게 매우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판사는 피고인이 어떤 사정을 갖고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범죄를 저질렀는지 아닌지만 따지면 돼요. 하지만 소설가는 다르죠. 인물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 쓰는게 좋아요”
도 변호사는 소설 쓰는 것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 2월 법복을 벗고 ‘추리소설 쓰는 변호사’로 변신한 그를 12일 서울 서초동 법률사무소에서 만났다.
도 변호사는 2010년 5월 단편 <선택>을 시작으로 8년 동안 11편의 책을 연달아 썼다. 대부분 소설이었다. 판사 시절에만 10편을 펴냈다. 주중엔 오롯이 재판에 몰두했고, 주말에 틈을 내 소설을 썼다. 일주일 내내 글을 쓴 셈이지만 지겹지 않았다. 그의 소설에 추리소설 마니아층부터 뜨겁게 반응했다. 데뷔작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신인상을 받았고 2014년에는 백백교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장편소설 <유다의 별>로 추리문학대상까지 거머쥐었다.
소설은 때론 삶의 불만을 배출하는 통로였다. 도 변호사는 “판사 일을 하다보면 ‘이렇게 나쁜 사람을 법으로 단죄할 수 없나’ ‘충분히 봐줄만한 행동인데 처벌대상이 될 수 밖에 없을까’하는 답답함이 들 때가 있었다”며 “고진 변호사는 법조계 생활을 오래 하면서 느꼈던 나의 답답함을 대신 해소해준 인물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판사 시절 정의와 법 사이의 간극에서 갈등하고 답답해한 적도 있었다. 화장품을 불법수입해 판매한 혐의를 받는 스무살 학생의 형사사건을 맡았을 때였다. 학생이 실제 올린 수익은 몇 백만 원이었지만, 법에서는 매출 상당 부분을 추징하도록 하고 있었다. 유죄를 선고한다면 학생에게 몇억 대 추징금을 물려야했다. 선처를 구하는 스무살 학생에게 억대 추징금을 물리는게 정당할까. 실수인 척 추징금없이 1심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소설가를 꿈꿔본 적은 없었다. 마흔 줄에 들어서고 직업에 익숙해지다보니 ‘제2의 사춘기’가 찾아왔다. 도 변호사는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생활에 답답함을 느꼈다”며 “판사 도진기가 아닌 인간 도진기만의 영역을 갖고 싶었다”고 했다. 2009년 헌법재판소에서 파견 근무할 무렵 일본 추리소설과 가까워졌다. 1시간 남짓 지하철로 출퇴근하면서 히가시노 게이고등의 작품을 탐독했다.
판사 이름을 걸고 추리소설을 써도 될까 고민했던 날들도 있었다. 필명을 쓸지 고민했지만 이내 실명으로 당당히 책을 내기로 했다. 도 변호사는 “남들은 튄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판사가 왜 그래’란 생각보다는 ‘판사는 왜 안돼’라고 생각하려 했다”며 “판사도 소설 쓰고 싶으면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책을 내고 언론의 조명을 받자 “글을 안쓰면 어떻겠냐”고 조언한 선배 법관도 있었다. 알겠다고 대답한 뒤 얼마 안 돼 또 책을 냈다.
법원을 나왔으니 판사 시절 차마 출간할 수 없었던 책들을 펴낼 생각이다. 판사를 주인공으로 한 법정소설도 그 중 하나다. 판사 시절엔 글의 소재나 표현 하나하나 스스로 검열했지만 지금은 조금더 자유로워졌다. 물론 판사 도진기와 변호사 도진기는 같은 사람이니 논리나 글이 하루 아침에 뒤바뀔 일은 없다. “변호사가 됐다고 사회문제를 다루는 무거운 글, 좋은 사람인 척 하는 글은 안쓸겁니다. 재미있고 논리적인 글을 쓰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한국을 대표하는 명탐정 캐릭터를 만들고 싶습니다”
고도예 기자/yeah@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