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탈출 등 파란만장한 삶 살며
신상옥 감독과 영화중흥기 이끌어
생전 뜻에 따라 가족장 치르기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 최은희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고인의 장남인 신정균 감독은 “어머니가 병원에 신장투석을 받으러 가셨다가 임종하셨다”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 2006년 4월 11일 남편인 신상옥 감독을 먼저 떠나보낸 뒤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했다.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삶 자체가 영화 같았다. 무려 130여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1950~60년대 한국을 대표할만한 여배우로 활동했다. 신상옥 감독과는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를 찍다 가까워져 1954년 결혼했고, 이후 신 감독과 ‘꿈’(1955)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수많은 작품을 찍으며 은막 스타로 큰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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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최은희의 빈소가 16일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연합뉴스] |
고인은 1978년 신 감독과 이혼하고 그해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공작원에 의해 납치됐고,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됐다. 두 사람은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지원을 받아 북한에서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최 씨와 신 감독은 1986년 오스트리아 빈 방문중 탈출에 성공해 10년 넘게 망명생활을 한후 1999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인은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제1회 국산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상록수’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로 대종상 여우주연상, 아세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또 고인은 ‘민며느리’(1965) 등을 연출한 여성 감독이기도 했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 거주)·명희·승리 씨 등 2남 2녀가 있다.
한편 고인에 대한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이장호(73) 감독은 “최은희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정말로 한국영화의 한 세기가 끝이 났다는 생각이 든다”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과거 조감독으로 고인과 함께 일했던 인연이 있던 이 감독은 “지난 4월 10일 신상옥 감독 추도식이 열린 지 엿새 만에 최 선생님도 영면하셔서 두 분은 정말 숙명적인 동반자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 엄앵란(82)은 고인 덕분에 영화배우의 길로 들어섰다고 떠올렸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최은희 선생님 나오는 영화를 구경 갔었다”며 “한강 모래를 다 뒤집어쓰고 연기하는 걸 보고 ‘영화배우가 대단한 거구나’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엄앵란은 “자기 살림 다 팽개치고 사생활도 없이 오로지 영화에만 몰두한 분”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현재 지방의 한 요양병원에 머물고 있는 배우 신성일(81)도 최씨의 별세 소식에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신성일은 최씨와 신상옥 감독의 제작사 신필름을 통해 영화계에 데뷔했다. 네티즌들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간 영화인”,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던 분”이라며 추모의 글을 올렸다.
고인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들은 “영화인장으로 치러야 한다는 영화계 의견이 많았지만, 어머님 생전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2호이며, 발인은 19일 오전, 장지는 경기도 안성 천주교공원묘지이다.
서병기 선임 기자/w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