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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생 더 구조 못한 죄책감…불면의 고통, 술로 이겨”
생존자 김성묵씨 인터뷰
구명조끼 못벗어 줘 마음의 짐…
사회복귀 실패 고통의 나날
유족과 함께 세월호 활동가로


세월호 생존자와 유족, 사건 당사자 등에게 세월호는 ‘살아있는 고통’이다. 세월호 4주기를 맞은 지금도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술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다. 최근 광화문 세월호 천막 인근에서 만난 세월호 생존자 김성묵(41·사진) 씨도 이중 한 사람이었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근무했던 김 씨는 그날 세월호에 탑승했다. 진도 앞바다에서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을 태운 채 가라앉던 배 안에서 학생들을 구조했고 당시 상황도 직접 목격했다. 김 씨는 “그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줄 사람도 있어야 한다”며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하지만 인터뷰 도중 사고 당시를 떠올릴 때면 그의 눈시울은 잠깐씩 붉어졌다.


김 씨는 그날 3~4층에 위치한 큰 홀에 있었다. 그는 “승객들은 당시 생명이 위급한 상황임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배는 옆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승객들은 “이렇게 큰 배가 설마…”라며 다들 머뭇거렸다. 선내 안내방송은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때 갑자기 물이 차올랐고, 승객들은 그제서야 위급한 상황임을 인지했다. 승객들은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승무원이 떠나고, 구조대원도 보이지않는 배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김 씨는 끝까지 배에 남아서 아이들과 다른 승객들을 구출하려고 힘썼다. 배를 거의 탈출한 상황에서 “안에 학생들이 더 있다”는 다른 승객의 말에는 용기를 내서 다시 선내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김 씨는 그 당시를 떠올리며 “제가 지은 죄가 크다”라고 했다. 그 배 안에 있던 아이들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주지 못한 점이,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지 못한 점이 그에게 있어서는 ‘죄’로 다가온다. 김 씨는 사고 뒤 오랜 시간을 병원과 집에서 보냈다. 용기를 내 들어간 직장에서도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동료와 지인들은 “조금 더 쉬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김 씨에게 물었다. 얼마 못가 회사를 관두게 됐다. 이후 김 씨는 사회예술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함께 연기활동을 하며 속에 묵혀만 뒀던 감정을 끌어내는 법을 배웠다. 덕분에 그를 짓눌렀던 죄책감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래도 세월호는 애써 외면했다. 세월호만 생각하면 죄스러운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 유족들의 연락이 왔다. 함께 고통을 이겨내자고 권유해왔다. 용기를 내서 찾아간 자리, 처음만난 한 세월호 희생자 어머니는 “잘왔다”며 그를 따뜻하게 껴안아 줬다.

그는 이후부터 세월호 활동가로 나서고 있다. 그리고 생계 유지를 위해서 틈틈이 일용직으로 일한다.

하지만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밤마다 불면증이 심해서 술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다. 그는 “불면증 때문에 원래는 정신과 약을 먹었는데, 요새는 술로 이겨내고 있다”고 했다.

다른 많은 생존자들은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고 후 4년이 지난 지금도 집에만 있는 경우가 상당수다. 아직도 사고 때문에 괴로워하고, 일부는 자해를 시도하기도 한다.

유족들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아직도 정신과 약을 먹으며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김 씨는 “정신과 치료는 딱딱하고, 상담치료는 아직 한국에서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있다”면서 “많은 피해자들이 도움이 안되지만 약을 받기 위해서 정신과를 찾아간다”고 했다.

세월호 진상규명에 대해서는 “전면 재조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진상조사에 대해) 답답하다”고 말했다. 진상조사가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은 까닭이다. 거듭 차분한 어조였던 그는 진상조사에 있어서는 더욱 힘을 줘 말했다. 김성우 기자/z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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