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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록 바꾸고 지우고…역사에서 사라진 여성들
서로마 멸망 황제 누이에 화살
칭기즈칸 딸들 정복지 통치 삭제
여성 사도 니노는 남자 둔갑도…
남성 세계사서 빠진 여성 복원

‘곰브리치 세계사’는 세계사 입문서의 결정판으로 꼽힌다. 이야기체에 감성적인 서술이 돋보이는 책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세계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정복자, 지배자, 기사, 전사들의 얘기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은 고작 10여명, 그것도 여왕, 왕비, 여신을 빼면 잔다르크가 유일하다. 비단 ‘곰브리치 세계사’만의 얘기가 아니다.

역사에는 왜 여성들이 보이지 않는 걸까? 세계 박물관 어디에나 똑같은 사냥하는 남자와 불 옆에서 수다떠는 여자는 우리의 본 모습일까?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다녀온 후 이런 글을 남겼다. ‘그들의 풍습과 관습은 다른 민족과 완전히 반대이다. 이집트에서는 여자들이 시장에 나가 물건을 팔고 남자들이 집에서 천을 짠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여성들의 상황에 무척 놀랐다. 도시의 거리에 나가 보면 모든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에서)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독일 출신의 작가 케르스틴 뤼커와 교사 우테 댄셀이 쓴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어크로스)는 역사에서 빠진 여성의 퍼즐, 그 희미한 흔적을 찾아나섰다.

저자들은 무엇보다 정보 부족이 역사 부재로 나타났음을 지적한다. 여성들이 비범한 일을 하면 올바르지 않다는 얘기가 만들어지고, 이는 사건을 기록하는 남성들에 의해 배제되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때로 고의적으로 흔적지우기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최근 다양한 유적과 문서의 발굴은 이런 빠진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화려했던 로마 제국의 멸망은 역사학자들의 관심사 중 하나다. 특히 5세기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관련,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호노리우스 황제의 여동생이자 게르만 왕비인 갈라 풀라치디아를 원인제공자로 지목하는 시각도 있다. 게르만왕 알라리크에게 납치돼 게르만의 왕비가 된 그녀는 남편이 죽자 서로마로 다시 돌아오게 되지만 불신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오빠 호노리우스의 죽음으로 그녀는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섭정을 시작한다. 표면적으로는 게르만의 왕비가 로마의 왕좌에 오른 격이다. 훗날 사람들은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의 손에 넘어가게 된 게 그녀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서로마는 남쪽으로 이동하는 반달족 등 여러 민족에 의해 무력해진 상태였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탄생한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여러 치적을 쌓아 대제로 불리지만 그를 만든 건 황후 테오도라였다. 테오도라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반란군에 쫒겨 도망치려하자 반란군에 맞서 콘스탄티노플을 지킬 것을 주장했다. 또 이후에는 어려운 처지의 여성들을 위한 법 제정에도 나서는 등 나라를 다스리는데 깊이 관여했다. 그럼에도 역사는 그녀를 기껏 ‘경기장 무희에서 황후로 신분 상승한 신데렐라’정도로 언급하고 있다.


몽골제국을 이룬 칭기즈칸의 드넓은 피정복지를 다스린 이가 칭기즈칸의 딸들이었다는 사실도 지워졌다. 칭기즈칸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대신 딸들을 정복한 땅의 왕들과 결혼시켜 딸들이 그 땅을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사위들이 딸의 통치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정복전쟁에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이런 칭기즈칸을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 사가들이 양피지에 여자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으면 모두 잘라냈다고 전한다.

중요한 업적을 이룬 여성을 남성으로 둔갑시킨 경우도 있다. 초기 기독교 시절, 여사도 니노는 이베리아 왕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니노가 세상을 떠난 후 자기 나라의 위대한 성인이 여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신학자들은 그녀가 사실 남자였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바오로가 높이 평가했던 여사도 유니아의 이름도 유니아스로 칭해 남자로 둔갑시켰다.

중세 시대 신학자들은 여자는 믿을 수 없고 연약하다는 이유로 신학박사가 되는 길을 막았다.

신학은 남자와 라틴어의 영역이었다. 마르그리트 포레트는 프랑스어로 ‘소박한 영혼의 거울’이라는 신학서를 써냈다. 여자가 신학책을 쓴 일이 없고 라틴어가 아니라는게 큰 문제가 됐다. 책은 공개적으로 불태워졌고 그녀는 1300년 6월1일 파리에서 화형당했다.

민주화의 시작인 프랑스혁명 당시 많은 영웅적 여성들이 있었지만 ‘자유, 평등, 박애’는 국민의 절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연극극본을 쓰던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들이 여전히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에 반발,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양성평등을 주장한 구주의 연극은 큰 소동을 불러일으키며 몇 번 공연도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가야 했다.

책은 그동안 남성중심으로 기술된 세계사에서 빠진 여성들을 복원해내는데 집중하고 있지만 기존의 남성의 업적을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균형감 있는 역사를 그려내는 데 책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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