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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시춘 “6월항쟁때 올드미스로 불려..실은 유치원생 엄마”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유시민 누나 유시춘 작가가 1987년 6월 항쟁 당시 기혼자로서 유치원 다니는 아이까지 있었지만 ‘올드 미스’로 불렸다고 말했다.

유시춘 작가는 “당시 수많은 (부모의) 자식들이 감옥에 가 있는 상황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아이들이 있다는 얘기를 못했다”고 설명했다.

유 작가는 27일 전날에 이어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6월 항쟁 당시 주역이 들려주는 30년 전 뜨거웠던 그날의 이야기’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시춘 작가는 “박종철 영정사진을 들고 영국대사관 쪽으로 진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돼 장안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라며 “지금은 돌아가신 제정구 전 의원님 등이 그때 함께 강동경찰서 유치장으로 보내졌고, 다음날 유치장 티비로 명동성당 시위 소식을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제 일생에서 가장 간절하게 기도했다”며 “우주의 모든 신께 ‘이 땅에 민주주의가 오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유 작가는 “그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였지만, 이미 2년전 해직된 상태였다. 전두환 해직교사 1호다”라고 했다.

그는 “유치원 다니는 남매가 있었다. 아이들한테 미안했다. 그러나 수많은 자식들이 감옥에 가 있고,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있다는 얘기를 못했다. (제가) 올드미스인 줄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돌아봤다.

유시춘 작가는 체포된 상황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계엄령 관련 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우리를 변호해주신 분이 조영래 변호사였다”며 “조영래 변호사님이 오셔서 ‘계엄령 풍문이 돈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전두환 정권에서 계엄령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때 아이들을 다시 못 보는게 아닌가 하는 공포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전국적으로 민주화 열기가 뜨거워 정권 차원에서 시위 참가자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고 한다.

유시춘 작가는 “민주화운동의 상승기여서 저희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YS와 DJ가 오셔서 영치금도 넣어주셨다”며 “6.29 선언이 나오고 ‘아 오래지 않아 나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6.29 선언이 나오던 날 ‘징역 안 살고 재판 안 받고 나갈 수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현실화된 거죠”라며 “이한열 장례식 전날 나와서 처음 간 곳이 이한열 장례식장이었다. 너무나 감격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시위 참가자들의 석방 뒤에는 미국의 역할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힘은 이 땅의 고조된 민주화 열망 때문이었다고 진단했다.

그는 “6.18 당시 계엄령 풍문이 돌 때 공포감마저 느꼈지만, 미국이 모종의 역할을 한 거 같다. 그러나 미국이 천사여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 국민의 민주화 염원이 컸기 때문이다”라며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물리력이 전두환이 경찰, 군대를 총동원했을 때의 물리력보다도 더 컸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유시민 작가는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에 올라 국난을 극복한 서애 유성룡의 13대 손으로 5명의 형제 자매가 있다. 그 중 누나 유시춘, 여동생 유시주가 특히 유명하다.

유시민 누나인 유시춘은 1973년 세대 신인문학상을 수상, 소설가로 데뷔했다.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교사, 시민사회운동가, 정치인 등으로 활약했다.

1987년 ‘살아있는 바람’을 시작으로 ‘응달학교’, ‘여성 이야기’, ‘우리 강물이 되어’, ‘6월 민주항쟁’, ‘그가 그립다’ 등 유명 소설을 집필했다.

유시민 여동생인 유시주는 서울대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고,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집필했다. 희망제작소 소장을 역임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임기말인 1987년, 6월 항쟁에서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했고,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노태우 대선후보가 6월 29일 직선제 수용 등을 골자로 한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했는데 훗날 6.29 선언으로 불린다.

soo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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