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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탐색]“성폭력 신고땐 ‘예술의 꿈’ 접어야”…문화계 ‘추악한 민낯’
-학연 지연으로 인지도 형성…고소는 곧 ‘무덤’
-남성 교수 80% 장악…가해자 옹호 분위기도
-고용 등 경제적 불안정성 심각…“참는 게 답?”


[헤럴드경제=정세희 기자] “당시 나에게는 그 분의 영향력이 지대했다. 그의 말에 반발하는 친구는 교실 밖으로 쫓겨났다. 합동평가에서 제외되었고 입시 정보를 받지 못했다. 성폭행을 당했지만, 그의 제자가 되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피해자 A씨의 고백

“사진작가를 꿈꾸던 B씨가 21살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는 선생님의 소개로 사진계에서 권위있는 작가 C를 만났습니다. 사진 이야기를 하면서 조언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는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그는 제게 다가와 “너는 여자애가 왜 이렇게 살갑지 못하냐”고 팔짱을 꼈습니다. 그는 “겁탈할 힘은 없으니 해외여행 가자”면서 허벅지를 만졌습니다. 선생님이 돌아와서야 그 행위들이 끝났습니다. - 피해자 작가 B씨의 노트 발췌

최근 문화예술계에서 성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문화예술계가 성폭력 사건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 현황 및 개선 방안 모색 : 문화ㆍ예술계를 중심으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발제를 맡은 여성예술인연대 소속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디렉터는 “문화예술계의 성폭력은 다른 분야의 성폭력과 다른 양상을 띈다”며 “이를 막기 위해선 그 구조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성폭력 피해 고발하면 예술가의 꿈 포기해야= 박 디렉터에 따르면 폐쇄성이 강한 문화예술계에서 성폭력 사건을 신고하려면 꿈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예술 분야는 콩쿠르, 신춘문예 등단 같은 뚜렷한 등용문이 드물고 10년 이상 활동을 하면서 인지도를 높여가는 게 일반적”이라며 “어느 지역의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가 초기 인지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남성 예술가가 글을 봐주겠다고 술자리나 작업실에 불러냈을 때 위험한 것을 감내하고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문화예술계 생태를 잘 모르는 성폭력 상담사나 변호사, 검사들은 “왜 거기에 갔느냐, 당신도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도 많다고 박 디렉터는 지적했다.

문화예술 분야는 청소년시기부터 도제식 교육이 이뤄지기 때문에 미성년자 피해가 많다는 점도 지목됐다. 지난 2010년 경남 유명 국악예술단 단장 성폭행 사건이 대표적이다. 단장은 개인교습을 받으러 온 15세 여중생을 집에 태워준다며 차안에서 성폭행을 했다. 단장이 6개월간 5차례 성폭행하는 동안 피해 학생은 가해자가 스승이기 때문에 부모님에게도 알리지도 못했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 현황 및 개선 방안 모색 : 문화ㆍ예술계를 중심으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우측부터 대한법률구조단 신진희 변호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이수연 선임연구위원,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윤선영 성폭력방지본부장, 여성예술인연대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디렉터, (사)탁틴내일 이현숙 대표, 서울해바라기센터 박혜영 부소장. [사진제공=한국여성인권진흥원]

▶학생 80%가 여성, 교수 80%가 남성…가해자는 다시 교단에= 문제는 피해자가 성폭력 사건을 고소하거나 공론화시킬 경우 명예훼손을 당하는 등 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학연ㆍ지연 문화가 팽배한 문화예술계에서 피해자의 하소연은 묻히기 십상이었다. 박 디렉터에 따르면 현재 예술 대학 학생의 80%는 여성이지만 교수의 80% 이상은 남성으로 매우 비정상적인 구조다. 게다가 서울 시내 예술대학 교수진은 70% 이상이 같은 학교 출신이다. 대학교에서 성폭력 성추행을 저지른 사람이 다시 교편을 잡아도 제재가 없는 이유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문화예술계에선 성폭력 사건을 겪어도 소송을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프리랜서가 대부분인 업계에서 가해자를 제재하기도 쉽지 않다. 고용 형태가 자유롭기 때문에 일반 회사처럼 가해자를 회사에서 자르거나, 위원회를 여는 등 회사 차원에서 처벌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폭행 가해자는 논란이 잠잠해지면 조용히 다시 등장하는 게 대다수다.

박혜영 서울해바라기 센터 부소장은 “센터에 방문하는 사람은 예술계를 아예 떠날 각오를 한 경우가 많다”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센터에 방문하기 조차 꺼려한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문화예술계에서 성폭력을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 받는다’는 인식이 형성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본적으로는 폐쇄적이고 남성적인 구조도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심포지엄에 참여한 한 활동가는 “학연ㆍ지연ㆍ남성 중심 문화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 예술을 이름으로 가해지는 성폭력 성추행 문제는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sa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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