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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호 출당 당원’ 사망선고 받은 정치인 박근혜
-1997년 정계 입문과 함께 고공행진했던 ‘선거의 여왕‘

-대선 승리 후 총선 참패로 몰락…선거의 아이러니

[헤럴드경제=최정호 기자]“1997년 대선 전에 나에게 찾아와 한나라당에 입당해 정치를 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를 받아들였다”

이회창 전 총채가 최근 출간한 회고록을 통해 밝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치 입문 순간이다. 20여년 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사람들에게 그 존재조차 희미했던 박근혜가 훗날 ‘보수의 아이콘’으로 또 ‘보수의 구태’로 애증의 대상이 되는 시발점이였다.
[사진=연합뉴스]

이 전 총재는 박 전 대통령의 첫인상에 대해 매우 차분하고 침착했으며 어두운 이미지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우리나라가 오늘날 경제난국에 처한 것을 보고 아버님 생각에 목멜 때가 있다면서 정치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설명이다. 당시 심정을 박 전 대통령은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IMF 이후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남은 생을 모두 바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보궐선거에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을 등에 업고 화려하게 정치에 입문한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저는 대한민국과 결혼했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의 행복만 생각하겠다”는 말로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또 자신에 대한 동정심을 자극하며 20여년 정치 인생의 강력한 무기를 만들었다.

실제 그가 수 많은 초선 국회의원을 넘어, 보수의 대표 주자로 올라서는데는 단 3년이면 충분했다. 정계 입문 3년 뒤인 2000표 년 박 전 대통령은 당시 한나라당 총재 경선에 출마, 이회창 총재에 이어 2등을 차지하며 부총재로 올라섰다. 
[사진=연합뉴스]

대표 주자가 된 박근혜의 행보는 거침 없었다. 2001년 이회창 대세론에 반발해 상향식 공천과 당권ㆍ대권 분리 등 ‘7대 당 개혁안’을 요구했고, 전격적으로 탈당해 ‘미래연합’을 만들었다. 원조 ‘친박연대’인 셈이다.

신념과 지조의 이미지를 입는데 성공한 박근혜의 힘은 ‘보수의 대위기’에서 크게 빛났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흔들리던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뛰어든 그는 17대 총선에서 121석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며 ‘세이브’에 성공했다. 이후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며 5차례의 국회의원 재ㆍ보선과 지방선거에서 완승을 거두고 ‘보수의 잔다르크‘가 됐다.

이후 ‘박근혜 대세론’은 10년 가까이 보수 정치의 상수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 대선 경선에서 패했지만, 보수 집권 여당의 대표로 그는 여야 모두에게 대체불가, 넘을 수 없는 큰 산으로 위력을 떨쳤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직후 비대위원장으로 이듬해 총선에서 152석이라는 압승을 거둔 것은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2012년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치 입문 15년만에 보수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하지만 보수의 아이콘, 선거의 여왕의 명성도 아이러니하게 그의 임기와 함게 생명을 다해갔다. 집권 초 고공행진을 했던 인기도도 세월호 사태와 메르스 사태 등으로 급락했고, 압승을 자신했던 총선은 최악의 참패로 끝났다. 그리고 결국 최순실 게이트와 함께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 대통령’으로, 또 자신이 만든 당에서 ‘강제 출당 1호 당원’으로 정치 인생을 마감했다.

choijh@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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