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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지의 물성으로 켜켜이 담아낸 ‘시간의 산책’
다양한 재료로 전통 한국화 실험
먹이 지닌 ‘정신성’은 오롯이 살려
작업실 주변 풍경·일상의 삶 포착
삼청로 갤러리현대 ‘유근택展’


“캔버스와 다르게 한지는 2미리도 안되는 얇은 종이이나, 스며드는 특성이 있죠. 스며든다는건, 공간이 있다는 뜻이죠. 이 공간은 생각보다 넓은 세계입니다. 시간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요”

중견 한국화가 유근택(52·성신여대 동양화과 교수·사진)의 개인전이 열린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는 한지에 수묵으로 ‘이상향’을 담아내는 전통적 한국화에서 벗어나 ‘일상’을 담아내며 한국화의 지평을 개척하고 있는 작가 유근택의 개인전 ‘어떤 산책’을 개최한다. 2014년 OCI미술관 개인전 이후 3년만이다. 전시에는 2015년 연구년으로 찾아간 베를린에서 작업한 작품을 비롯해 2017년에 제작된 근작까지 총 37점이 나왔다. 


전시장에서 만난 유근택 작가의 작품엔 기법상 변화가 뚜렸했다. 한지를 6겹 배접하고, 밑그림을 그린 뒤 철솔로 문질러 켜켜이 일어난 한지에 다시 분채와 템페라, 과슈 등으로 그림을 그렸다. 유화의 ‘마티에르’와는 또 다른 한지만의 물성이 살아있는 ‘질감’이 화면을 채웠다. 2015년 이후의 변화다.

“베를린에 갔을때, 작업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동양화가 더이상 운필만으로 현대인들의 감수성을 끌어들이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린다’는 방법론에 한계가 있다는 걸 스스로도 많이 느꼈고요” 작가는 지금껏 사용하던 모든 작업도구를 놓고 한지만을 들고 떠났다. 한지 물성에 대한 실험이 이어졌다.

그러나 ‘일상’을 담아내는 시선은 여전했다. 크게 ‘도서관’, ‘산책’, ‘방’ 시리즈로 나뉘는 이번 전시엔 작가가 늘 지나다녔던 작업실 주변 풍경과 삶의 모습이 담겼다. 모기장이 매달린 ‘방’시리즈는 성북동 작업실의 풍경이기도 하다. “얇디 얇은 모기장인데,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안도감이 든다는게 흥미로웠죠. 모기장 하나로 순식간에 ‘안과 밖’의 개념이 생기는 것도 그렇고요”존재론적 성찰로 연결되는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얇은 모기장을 표현하기 위해 오히려 굉장히 두껍고 거칠게 그려졌다. 


책이 빽빽한 도서관을 그린 ‘도서관’시리즈엔 여러가지 이미지가 중첩됐다. 빨래가 널린 빨랫대와 녹아내린 장총, 만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손 등 다양한 모티브가 등장한다.

“저에게는 사람이 걸치고 있는 옷과 빨래대에 널린 옷은 전혀 다른 물건으로 다가옵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젖은 옷이 마를때까지 ‘기다림’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지요. 도서관도 마찬가지 공간입니다. 지식과 역사가 쌓인 곳, 즉 기다림이 축적된 장소지요”유 작가는 전통 한국화에선 사용하지 않는 다양한 재료로 실험하지만 결국 ‘먹’이 지닌 정신성, 시간과 공간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 본질을 성찰하는 한국화의 핵심적 요소는 그대로 살려냈다.

더불어 정치성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일상’을 그리면서 일상에 내재된 정치성을 놓치지는 않았다. 촛불을 든 손과 태극기를 흔드는 손이 중첩된 작품앞에선 자연스레 지난해 광화문광장을 채웠던 ‘촛불’이 떠오른다. 작가는 “광화문 촛불을 그린 그림은 아니다”면서도 “10여년전 합정동 절두산 성지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천주교 신자들이 양초를 켜고 기도하더라고요. 바윗돌 아래 양초가 제 멋대로 휘어져 불꽃이 이는데, 그 이미지가 무척이나 강렬했습니다. 광화문 촛불은 이때 그 절절했던 이미지를 떠오르게 했지요”라고 설명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촛불에 대한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진 못했습니다. 앞으로 다시 해야 할 작업 중 하나죠”라고 덧붙였다. 전시는 9월17일까지 이어진다. 25일 오후 3시 작가와의 대화가 마련되며,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부 수석 큐레이터가 진행을 맡는다.

이한빛 기자/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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