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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민주항쟁 30년①]영정사진 든 노무현, 장례위원 문재인…이태춘을 아시나요?
-“서울에 이한열 부산에 이태춘”
-시위 중 최루탄 피격 후 고가도로 추락사 의혹
-장례위원 노무현ㆍ문재인 변호사
-이태춘 어머니 “文, 집이 못 사니까 300만원 모금해줘”

[헤럴드경제=김진원 기자] 87년 6월 민주항쟁에 잊혀진 열사들이 있다.

1987년 1월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며 쓰러 사망했다”고 박종철 열사의 고문 사실을 숨겼다.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같은해 6월 10일 국민평화대행진을 하루 앞두고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불씨가 커졌다. 박종철ㆍ이한열 열사는 이후 6월 항쟁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러나 6월 항쟁에 스러져 간 이들은 더 많다. 잊혔을 뿐이다.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이들을 조명해봤다.

1987년 6월 27일 고 이태춘 열사 장례식이 엄수되고 있다. 영정을 든 노무현 부산 국본 상임위원장과 문재인 상임위원. [사진=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1987년 6월 27일 고 이태춘 열사 장례식이 엄수되고 있다. 영정을 든 노무현 부산 국본 상임위원장과 문재인 상임위원. [사진=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서울에 이한열이 있다면 부산에는 이태춘이 있다.”

1986년 부산 동아대학교를 졸업한 이태춘(당시 27세) 열사는 태광고무㈜에서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였다. 당시 동아대 부총학생 회장을 맡았던 윤준호 씨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고민이 깊던 분이었다”고 했다.

1987년 6월 18일. 서면로터리를 중심으로 한 부산 시내는 대학생과 시민 30여만명으로 가득찼다. 남포동, 국제시장, 보수동 로터리도 수천 명씩 모였다. 이날은 최루탄에 피격해 숨진 이한열 열사의 죽음에 항의해 정한 ‘최루탄 추방의 날’이었다.

일명 ‘오바브릿지’로 불린 부산 동구 좌천동 범일고가도로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했다. 해가 지고 밤 10시께 시위대는 경찰 저지벽으로 전진했다. 인파는 고가도로에 가득했다. 경찰은 다연발 최루탄을 난사하며 진압을 시작했다. 고가도로는 아수라장이 됐다.

최루탄의 연무가 걷혔다. 고가도로에서 떨어진 이태춘 열사가 시민들에 의해 발견됐다.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다. 뇌수술을 받았다. 발견 당시 옷에 최루탄 가루가 뿌옇게 묻어 있었다.

이태춘 열사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23일 오후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며 신부들이 가톨릭센터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이태춘 열사가 숨지고 25일 오후8시 부산대병원에서 부검이 진행됐다. 유족들과 함께 부산국본 대표 노무현 변호사, 천주교 부산교구 김두환 신부, 한미병원 강수만 박사가 참관했다. 최루탄 피격 후 추락했다는 의혹이 일었지만 경찰은 단순 추락사로 발표했다.

27일 오전 10시. 이태춘 열사가 평소 다녔던 범일성당에서 장례식이 엄수됐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장’으로 거행됐다. 국본 상임집행위원장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태춘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시민들과 함께 문현동 로터리까지 침묵시위를 벌였다.

부산 국본 조직도. [사진=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당시 국본 부산본부 사무국장으로 이태춘 열사 장례식을 꾸린 고호석 씨는 “장례 행렬 자체도 일종의 시위였다”며 “당시 나는 경찰에 쫓겨 다니는 상황이라 먼발치에서 차를 타고 따라갔다”고 했다. 이어 “경찰이 행렬에 침탈해 들어오면 어쩌냐 하고 마음 졸이면서 지켜봤던 기억이다”고 했다. 이태춘 열사는 양산 가톨릭공원 묘지에 영면했다.

28일 오후 3시 중앙성당 농성이 다시 시작했고 이튿날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과 양심수 석방을 골자로 한 6ㆍ29선언을 발표했다.

이태춘 열사 어머니 박영옥(86) 씨는 “태춘이가 그래 가고 노무현 변호사하고 문재인 변호사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며 “범천동 산꼭대기에 살았는데 집이 너무 못 사니까 둘이 ‘아이고 뭐 이런데 삽니까’ 하더니 모금해서 그때 돈을 300만원을 갖다줬다. 그걸로 집을 얻어서 살았다”고 했다.

이어 “나중에 내 또 다른 아들이 주차장 한다고 하다가 사기를 당해서 문재인 변호사를 찾아갔다”며 “도와줘서 덕분에 잘 해결 됐다”고 했다.

박 씨는 “유가족들이 모이는 ‘민주공원’ 이라고 있는데 이명박 대통령 되고 박근혜 대통령 되고 우리는 뭐 죽은 듯이 살았다”며 “사람들이 문재인 빨갱이라고 할때 속이 상해서 죽을뻔 했다. 노인정 가서 싸우고 막 그랬다. 인자는 우리 아들이 대통령 된 것보다 더 좋다”고 했다.

jin1@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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