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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은, 떠나고 싶은 의자어긋나고 빗나간 사물의 꿈
국제갤러리 안규철 개인전
‘당신만을 위한 말’…내달 31일까지

하얀 벽엔 지그재그로 나무 레일이 설치됐다. 나무공을 가장 윗쪽의 레일에 올리자 비스듬한 경사를 따라 또르르 굴러내려온다. 벽의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레일을 따라 이동한 나무공은 레일이 끝나는 지점에서 툭 떨어져, 바로 아래 나무레일로 안착한다. 나무공은 다시 오른쪽 끝에서 왼쪽끝까지 이동하고, 아래 칸으로 툭 하고 떨어진다.

레일위를 이동하는 공은 빗소리 같은 특유의 소리를 낸다. 저 공이 과연 이 여정을 잘 마칠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공을 눈으로 쫓다가, 곧 예상가능한 루트를 반복적으로 이동하는 공의 궤적에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 공이 이동하는 2분여 동안 작품을 바라보며 ‘멍 때리는’ 것이다. ‘개념미술가’ 안규철의 신작 ‘머무는 시간Ⅰ’이다. 작가는 “시작과 끝이 있는 인생,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순간 궤적을 벗어나면 끝나버린다”며 “아주 심심한 일이지만 그 사이 무슨일이 일어날 지, 그 사이 머무는 시간을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일상의 사물과 언어를 사용해 사물의 본성과 세계의 부조리ㆍ모순에 대한 사유로 이끄는 작업을 계속해 온 작가 안규철의 개인전이 열린다.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는 21일부터 안규철 개인전 ‘당신만을 위한 말(Words Just for You)’을 개최한다. 전시에는 초기 오브제 작업 연장선상에서 원, 구, 직선, 나선구조 등 보다 조형적이고 근원적 형태들을 모티브로 한 신작 10여점과 작품구상 드로잉이 선보인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었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전 이후 2년만이다.

전시 작품은 대부분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물건이다. 그러나 어딘가 ‘이상’하다. 나무의자 다리는 배를 젓는 ‘노’라 의자에 앉을 수도 없다. 울려서 소리를 내야하는 종은 펠트로 만들어져 ‘침묵’한다. 앞으로 달려가야 하는 두 대의 자전거는 서로 앞뒤를 갈라 붙여 안장만 두 개거나, 손잡이만 두 개다. 제대로 서 있을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다. 그런가 하면 초식동물인 양은 맹수가 되고싶어 표범무늬를 입었다. 안규철 작가는 작품을 설명하면서 “여기 있는 사물들은 전부 어긋나고 빗나가 있다”며 “자신에게 주어진 궤도를 이탈하려 한다면, 궤도 밖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그건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했다.

서울대 미대에서 조소를 전공한 안 작가는 졸업 후 7년간 미술잡지 ‘계간미술’ 기자로 활동한 뒤, 독일에서 유학했다. 작가는 자신을 “미술과 글의 중간에 위치한 사람이자 중계자”로 표현했다. 이미지 혹은 글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 중간적 위치에서 적절히 활용하는 덕에 ‘개념미술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나를 개념미술가라고 부르는데, 사실은 절반만 맞다”며 “사유의과정이 출발점이 되지만 그걸 형태로 구현하는 과정, 즉 생각에 물질을 입히는 과정이 나에겐 상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작가는 작은 드로잉북을 내내 들고 다녔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글로 또 그림으로 옮겨놓는 일종의 작업 수첩이다. 펼쳐보니 다음 작품의 밑거름이 될 아이디어들이 빼곡하다. 2~3달이면 한 권을 다 쓴다고 했다. 다음 전시엔 또 어떤 사유가 형상화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전시는 3월 31일까지.

이한빛 기자/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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