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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 칼럼-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광장민주주의와 촛불 든 가수들
87년 광화문 광장에는 ‘님을 위한 행진곡’ ‘천리길’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민중가요들이 울려 퍼졌다. 당시 광장은 전쟁터 같았다. 한 편에서는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학생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서민들이 있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전경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매캐한 최루탄이 터지던 그 곳에서 이들 노래들은 마치 진군하는 행진곡처럼 비장했다.

김민기, 정태춘, 박은옥, 양희은 등등. 대학가에서 불리던 이들의 민중가요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인해 조금 더 대중적으로 불리게 되었고 집회에서 노래하던 안치환은 민중가요를 기반으로 그 저변을 대중가요로까지 확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타는 목마름으로’나 ‘광야에서’ 같은 곡은 그래서 노래방에서도 부르게 되었고,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나 ‘내가 만일’ 같은 곡들은 광장에서는 물론이고 TV 음악차트에서도 소비되었다.

‘밀실’과 대척점으로서의 ‘광장’이 정치적 의미를 넘어서 문화적 의미를 띠게 된 건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해서였다. 80년대 민주화 시절에는 광장도 밀실도 모두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2002년 광화문 광장은 그 공간이 문화적 의미를 담게 되면서 축제의 공간이 되었다. 빨갱이라는 지칭으로 갖게 됐던 붉은 색 콤플렉스는 붉은 악마들로 가득 메워진 광화문 광장을 통해 극복될 수 있었다. 이 문화 축제에서 “대한민국!”은 진보 보수를 뛰어넘어 누구나 외치는 구호가 될 수 있었다. 이 때 광장에 선 이는 윤도현이었다. 그는 ‘오 필승 코리아’를 부르며 광장의 붉은 물결을 한 마음으로 요동치게 했다.

그리고 2016년 광화문 광장. 성난 민심이 촛불로 모여들던 그 현장에는 이승환이 먼저 무대에 올랐다. 그는 민중가요가 아닌 자신의 히트곡을 시국에 맞춰 개사해 불렀다. 그가 93년에 발표했던 ‘덩크슛’이라는 곡은 “주문을 외워보자. 오예. 하야하라 박근혜”로 바뀌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전인권이 부르는 절절한 ‘애국가’에 광장은 일순 엄숙해졌다. 양희은은 과거 민중가요의 중심에 섰던 ‘상록수’를 불렀다. “끝내 이기리라-”라는 마지막 절창이 흐르는 순간 광장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광장은 어르신부터 아이까지 또 대학생은 물론이고 직장인 심지어 중고등학생들까지 가득 채워졌다. 또 이런 일반인들 틈에는 연예인들도 서 있었다.

87년의 민중가요가 2002년의 대중가요로 이어지고 2016년에는 민중가요, 대중가요가 뒤얽히는 풍경은 집회문화에서도 똑같이 이어졌다. 87년의 그 거센 목소리들은 2016년에도 여전히 크게 울려 퍼졌지만 또한 2002년의 축제 같은 분위기가 이번 광장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2016년의 광화문 광장은 그래서 87년과 2002년을 통과해온 시민들의 성숙한 집회문화를 만들었다. 23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운집했지만 시위는 평화적이었다. 시민들은 전경들의 등을 두드렸고 전경버스에 꽃을 피웠다. 그러면서도 집회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준엄했다. 투쟁이 아닌 공감과 소통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웠다.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마다 작동해온 광장민주주의. 광장은 투쟁하던 안치환의 시대, 문화가 된 윤도현의 시대를 넘어 그 두 가지가 결합된 이승환의 시대로 이어졌다. 광화문 광장의 진화된 풍경은 그래서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을 보게 만든다.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건 성숙한 국민들이라는 것. 어둠 속에서도 저마다 촛불 하나씩을 들고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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